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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사 탐험] 우리 손으로 민족의 巨業 세울 터

  •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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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한옥                                                                (기와집이 즐비한 최근의 개성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었다. 이때를 틈타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이들 개항지를 중심으로 1901년부터 소규모의 배전사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1910년 일본이 이 땅을 강점하자 일확천금을 꿈꾸고 몰려온 일본인들은 앞을 다투어 배전사업에 진출함으로써 전기사업은 그들의 독점물이 되었다. 그 결과, 전등은 지방의 작은 도읍까지 보급 되어 1931년 말 당시 전국의 배전사업체는 89개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배전사업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 자본가들이 똘똘 뭉쳐 설립한 민족기업이 있었다. 바로 개성전기(주)였다.

일본인 가운데 가장 먼저 한반도에 진출한 업체는 부산전등(1901년)이다. 이어 인천전등(1905년)이 들어왔고, 원산에는 최초의 상업발전을 시작한 수력발전소(1912년)가 생겼다. 가스사업으로 진출한 일한와사(주)는 콜부란(Collbran)으로부터 한미전기(주)를 매수한 뒤 1915년 경성전기(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전국에 배전 사업체들이 난립하자 전기요금도 경쟁적으로 비쌌다. 오늘날이야 국가가 국영기업을 통해 전력사업 운영을 맡기고 전기요금도 인상하지 못하도록 틀어쥐고 있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속셈은 일확천금이 목적이었으니 전기요금은 제멋대로였다.

입으로 호호 불어도 ‘꺼지지 않는’ 신기한 전깃불이 들어오자 시민들의 삶은 천지가 개벽한 듯 편리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요금은 큰 부담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기요금 인하와 전기사업의 공영화라는 시민운동이 확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931년 12월 전력통제계획을 수립 발표했다. 통제계획의 주요 내용은 첫째, 발전분야는 수력계통별로 동일 계열에 의한 민영으로 하고, 둘째, 송전간선분야는 원칙적으론 국영으로 하며, 마지막으로 배전은 몇 개의 구역으로 분할, 민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전국에 난립한 배전사업체들은 경성전기(주), 남선합동전기(주), 서선합동전기(주), 북선 합동전기(주) 등 4개권으로 대통합이 이루어졌다.

 

개성 인삼장(구한말 개성 인삼장 풍경, 멀리 배전주가 보인다.)

인삼 농장 지주 김정호와 개성전기(주)의 설립

그런데 국권을 강점당하고 전기사업권조차 일본인들이 점령했던 암울한 시기에 조선인 주도하에 조선인 자본으로 세워진 전기회사가 있었다. 개성전기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사의 근거지는 개성이었고, 그 중심에는 인삼농장 지주 집안 출신인 개성상인 김정호(金正浩, 1885~?)가 있었다.

고려의 왕도 송도, 즉 개성은 예로부터 인삼과 홍삼으로 알려진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인들은 과거 응시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정도로 심각한 차별을 받아왔다. 입신출세 길이 막힌 개성 사람들은 결국 상업을 통한 경제적 부를 향하게 됐고, 자연삼을 인삼으로 재배하는 법을 실용화시키는 등 인삼의 상권을 틀어쥐었다.

그들은 조선식산은행 개성지점이 운영하던 자금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금융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들이 신문물인 전기사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김정호는 전기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개성의 유지들을 설득한 끝에 영신사 사장 손봉상, 개성사 사장 박태현을 비롯한 공성학, 최증지, 고수후 등 개성의 내로라 하는 유수 상인들이 총출동해 개성전기의 창업 발기인 대회를 가진 것이 1915년 11월 30일의 일이었고, 장소는 김정호의 집이었다.

김정호는 발기 취지문에서 “눈앞의 작은 이익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전기산업 같은 원대한 거업(巨業)을 세우는 것이 개성 지방과 민족 발전에 공헌하는 길” 이라고 역설했다. 김정호가 개성전기를 민족기업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은 개성상인의 저력으로서 전기를 장악하고 식민지 백성들에게 위세를 부리던 일본인들에 대한 도전장이기도 했다.

 

인천전기(주)의 사옥과 발전소(1905년)(1905년에 설립한 인천전기(주) 사옥과 발전소)

조선 중앙부 밝힌 개성전기, 서선합동전기(주)로 통합 당해

개성전기는 착실하게 성장 발전했다. 산요전기로부터 양도된 80마력의 원동기와 70kW 흡입가스발전기를 1918년 3월 28일 설치하고 그해 4월 1일부터 전력공급을 개시했다. 이후 1920년 6월에는 150kW 발전기 증설, 1926년에는 250kW급 기력발전기를 독일로부터 도입해 신막(新幕)발전소를 신설했다. 1931년에는 1,000kW급 발전기를 증설해 총 발전설비를 1,470kW로 늘려나갔다.

공급구역을 개성 외에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산간벽지까지 배전선을 연장, 1936년 말 대흥전기 898.1km 보다 많은 968.4km의 배전선을 보유했다. 수용호수는 전국 총수의 2.2%로 전체 9위였고, 전등 수도 전국 총 등수의 1.2%로 12위를 기록했으며, 전기요금은 개업당시부터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경성전기(주) 수준으로 낮췄다. 말하자면 국내에서 가장 큰 경성전기(주)와 맞먹는 경쟁력을 갖춰나간 것이다.

그러나 개성전기(주)의 성장 발전상은 곧 조선총독부의 타깃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전기사업에 참여한 민족자본을 몰아내고 일본자본 독점 체제를 갖추기 위해 1931년 조선전력통제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5년 뒤인 1936년 11월, 개성전기(주)는 창업 20년 만에 서선합동전기(주)로 통합당하고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개성전기(주)는 통합을 앞두고 발행한 연혁사 말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전도(全道)에 있어서의 전기사업 수는 50여 개, 여기에 자가용 기타를 합치면 실로 크고 작은 업체가 200여 개 되지만(중략) 아직도 이 시설, 이 혜택을 입지 못하는 지방도 적지 않다고 사료된다. 오늘날에 있어서 전등 없는 생활만큼 비애롭고, 고난에 찬 가슴 아픈 일은 더 없다. 우리 개성전기는 중앙부 조선지방에 힘이 닿는 한 전기조명을 제공하고자 오늘에 이르기 까지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간 수많은 난관을 뚫어가며 상당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하략)”

선죽교(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무리들에게 피살된 개성의 선죽교)

– 원본글 보러가기 ‘수차와 원자로 9월호’ http://ebook.khnp.co.kr/Viewer/9KJ90EX270XS

송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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