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전력사 탐험]수력의 始祖, 운산수력발전소 구한말 격변 속에서 황금광시대 열어

  • 2014.10.28.
  • 3479
  • 블로그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1 1900년 연초의 겨울날씨 속 운산금광(1900년 연초 눈 쌓인 운산금광 전경)

우리말 중에 ‘노다지’라는 말이 있다. 흔히 금(金, Gold)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수지맞거나 신 나는 일이 많을 때에도 노다지라고 한다. 그런데 노다지가 영어의 노터치(NO Touch), ‘손대지 말라!’는 외침이 우리말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수력발전소의 시조(始祖)인 운산수력(雲山水力)발전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때 미국이나 호주에 불어닥쳤던 골드러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도 황금광(黃金鑛)시대가 있었다. 왜정 때 개발이 시작된 평안북도 운산금광으로, 이 광산은 자그마치 28억 평이라는 동양 최대 규모의 금 매장지였다.

 

2 운산금광 건설을 담당한 동양합동 광업회사(동양합동광업(주). 알렌과 헌트 등 미국인들은 운산금광 채굴권을 독점해 큰 이권을 챙겼다.)

고려 때부터 지금 캤던 조선의 재보(財寶), 그러나 ‘노터치’의 대상

운산금광은 고려조 때부터 지금(地金)을 캐던 광산이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황실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며, 왕가와 귀족들의 금 수요를 충당하는 한편 원(元), 명(明), 청(淸) 등에 수출되거나 사신들이 공물로 싸 들고 가던 중요 품목 중의 하나였다. 운산수력발전소는 운산광산의 전력공급 전용 발전소 였다. 1905년에 전력공급을 개시한 운산수력의 발전설비는 500kW. 요즘 한 기당 수십, 수백만 kW급 발전소에 비하면 규모가 미미하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최첨단 대형 발전소로 프란시스형 수차를 갖추고 있었다.이 발전소는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 아래쪽에 위치했다.

운산읍에서는 직선거리로 30여 ㎞, ‘진달래꽃’ 시인 김소월의 고향이면서 북한 핵문제의 진원지인 영변읍에서는 50여㎞ 북쪽이다. 강우량이 풍부한 청천강 지류 구룡강 상류의 험준한 계곡을 택해 언제를 건설한 후 상당히 높은 낙차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수력발전의 효시(嚆矢)를 이루며, 이후 수력발전을 위한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수력발전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황실의 중요 자산이기도 했던 이 거대 이권이 걸린 운산금광이 무슨 연유로 미국인 손아귀에 넘어가 조선인들은 손도대지 말라는 ‘노터치(NO Touch)’의 대상이 되었는가? 청·일전쟁 전후 조선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처럼 단시일 내로 근대화를 이루고 싶었지만 재정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개화와 함께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 이었지만 자본도 기술도 전무한 상태였다.

1882년 조·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에 입국한 알렌(H.N. Allen)은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광산을 담보로 미국에서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할 것을 고종에게 조언했다. 고종 역시 조선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개발한다면 양국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운산금광 내부(운산금광의 갱 내부. 조선인에게는 노다지(노터치, NO Touch)의 어원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 최초의 500kW급 수력설비,당시로선 최첨단 대용량 발전소

경복궁에 전기설비가 도입되었던 1887년,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된 알렌은 조선의 광산 채굴권을 얻고자 본격적으로 교섭에 나섰다. 알렌은 뉴욕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아메리칸 트레 이딩사 사장 모스(J.R. Morse)를 앞세워 협상을 벌였고,그 결과 모스는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운산금광 개발권을 손에 쥐었다. 그리하여 1895년 7월 15일, 운산 일대 금광을 개발하기 위한 조선개광회사(KoreaMining & Development Co.) 설립 계약이 체결되었다.

자본금 10만 달러의 조선개광회사는 25년간 운산군 일대 28억 평 규모의 어마어마한 금광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부여받았으며,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모스가 금광 개발에 의욕을 보이지 않자, 알렌은 시애틀의 사업가 헌트(L.S. Hunt)를 끌어들였고, 헌트는 1897년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와 동양합동광업(주/ 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 OCMC)을 설립했다.

자본금을 조선개광회사보다 50배나 증액시킨 동양합동 광업(주)은 운산금광 채굴을 위해 국내 최초로 압축기를 이용한 착암기를 사용하는 등 첨단 광업장비를 대대적으로 투입했다. 분쇄기와 함께 제련소가 갱마다 설치되었고, 전압 2300V, 발전량 500kW의 수력발전소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세워졌다. 운산수력발전소의 탄생 배경이다.

<한국광업 100년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광구 제1호 운산금광은 개발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등록된 광부만 1만 여 명이 넘는 동양 최대 규모로 발전했으며,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지급하기 시작해 중·일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까지 매년 10% 이상의 고율 배당을 실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하면서 미·일 관계가 약화됐고, 조선에서 노다지, 즉 황금시대를 이끌어온 동양합동광업(주)도 1939년 800만 달러의 일본광업으로 운산금광을 양도하면서 한국의 황금광시대도 막을 내렸다. 구한말 전차, 전등사업 추진으로 조선의 개화를 이끌었던 왕실기업 한성전기회사가 미국인 콜부란(Collbran)에 의해 미국 회사로 넘어간 뒤 다시 일본와사로 팔아넘겼던 초기 전력사업과 비교해보면 왕실의 재보(財寶)였던 운산금광이 미국인 손에 침탈되어 일본광업으로 넘어간 배경이 닮아도 너무 닮았다.

3 사금을 채취하는 조선인들(사금을 채취하는 조선인들)

– 원본글 보러가기 ‘수차와 원자로 10월호’ http://ebook.khnp.co.kr/Viewer/8Z12EA604Y7O

송미화

1

댓글 남기기

블로그지기
블로그지기
한수원의 생생한 소식과 한수원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