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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사 탐험] 고희 맞은 화천수력발전소

  •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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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맞은 화천수력발전소

‘남한 최북단에 위치한 민족의 등불’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그의 <곡강시(曲江詩)>에 표현한 문장의 한 대목으로, 사람은 칠십까지 사는 일이 드물기에 살아가는 동안 술잔을 나누며 즐겁게 살자는 뜻이 담겨있다. 칠십을 고희(古稀)라 일컫는 것도 이 시에서 떼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옛날 칠십의 나이는 오래 산 축에 들었다. 그래서 고희를 맞는 칠순잔치는 집안의 큰 경사였다. 지금이야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100세 시대를 꿈꾸고 있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은 환갑을 넘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발전소 가운데 칠십을 넘기고도 끄떡없는 발전소들이 있다. 칠십을 넘겼으니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면 일제 때 지어진 발전소들이다. 화천수력발전소가 지난 10월 준공 70주년 기념행사를 조촐하게 가졌다.
화천발전소는 북한강 최북단 발전소로, 한국동란 당시 엄청난 대가를 치렀던 값진 전과였다.

화천수력발전소
[사진 1. 초기의 행정사무소. 일본식 건축양식이지만 지금은 헐렸다/ 사진 2. 한국동란 당시 북한이 수공 작전을 펼치자 연합군이 어뢰로 댐을 폭파해 강제로 수위를 낮췄다/ 사진 3. 1952년 11월 화천수력 1호기 복구공사 준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치하 연설을 하고 있다]

총독부의 한강수계 개발 계획과 일제의 야욕

한강계 수력발전소의 개발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독부는 수력조사 결과 북한강수계 화천(華川), 금화(金化), 춘천(春川), 청평(淸平) 등 4개의 수력지점을 통해 예상 발전출력 19만 7,920kW로 추정 하는 설비를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을 통틀어 남한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전원이었다. 이 가운데 제1차 계획으로 화천(8만 1,000kW)과 청평(3만 9,600kW) 두 지점에 1939년 1월 댐을 축조하기 시작해 5년 뒤인 1944년 8월에 청평발전소를, 그리고 10월에 화천발전소를 준공했다.
이 두 지점의 발전소 착공은 1939년 2월에 설립한 한강 수력전기(주)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준공은 조선전업(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청평발전소는 발전기 2대를 모두 설치 완료했으나 화천발전소는 발전기 3대 중 2대만 완성되었고, 1대는 해방 당시까지 설치가 끝나지 않아 화천발전소의 출력은 5만 4,000kW에 그쳤다.

화천발전소는 건설 당시 하루 3천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을 정도로 남자는 물론 아녀자들까지 총동원되어 댐 축조와 함께 건설공사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44년 5월, 2만 7,000kW 용량의 1호기가 준공되어 발전을 시작했고, 그해 10월, 같은 용량의 2호기 시설을 완공하고 운전에 들어갔다. 3호기는 약 30% 정도 자재가 입하되어 설치 공사를 하는 도중이었고, 4호기는 기초공사만 완료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발전소가 한창 건설 중이던 당시 일제는 중국과의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시켜 물자확보가 어려운 때였다.
날이 갈수록 물자확보가 어려워지자 일제는 경인지방, 특히 인천에 위치한 탱크 생산 공장인 조병창(造兵廠)과 특수강을 생산하는 고주파(高周波) 공장 등의 원활한 전원확보를 위해 화천 및 청평발전소의 건설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2-화천수력발전소
[사진 4. 현재의 화천수력발전소]

한국동란 중 탈환 그리고 전재복구와 새로운 희망

한반도 허리에 위치한 화천발전소는 38선 이북 북한 치하에 있었다. 1948년 5월 14일, 이른바 북한의 일방적인 5.14 단전조치로 남한의 전력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지만 북한은 전기가 남아돌아 화천발전소의 일부만 가동, 강원도 북부지방에만 전력을 공급했을 뿐이었고, 나중에는 시설이 불필요해 장진강발전소로 이설할 계획까지 세웠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화천발전소를 상대로 빼앗고 빼앗기는 일진일퇴의 전투가 벌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암흑천지의 남한을 살리기 위한 커다란 생명선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51년 5월, 국군에 의해 적지의 화천발전소와 대붕호 탈환에 성공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눈물을 삼키며 감격해 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화천발전소”라면서 수많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섬멸한 대붕호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라 명명했다.
처절한 피비린내 속에서 탈환한 화천발전소는 모든 시설이 폭파 또는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4-전재복구 직원들이 군복을 입고 현수막 아래서 기념촬영_조선전업 화천발전소임을 보여주고 있다_피흘려 찾은

[사진 5. 전쟁이 끝나고 전재 복구에 참여한 직원들이 군복을 입고 화천발전소 입구 현수막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선이 안정되면서 긴급 복구공사가 시작됐다. 마침내 1954년 7월, 화천수력 1,2호기는 5만 4,000kW의 전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전력은 남한의 평균발전력 50% 가까운 양이었으며, 화천발전소는 당시 남한 최대의 발전소로 등장했다. 전화(戰禍)로 막심한 전력난을 겪고 있던 당시 복구 불가능이라고 할 만큼 심하게 파괴됐던 발전소를 국내 기술진만으로 복구했다는 사실은 전력사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38선 이북 북한 치하에 있을 때는 그 하류에 있던 청평발전소의 발전을 방해하고자 고의적으로 자행됐던 유하량의 방류억제가 남한 주권 하에 들어오면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화천발전소는 이후 1957년 11월과 1968년 6월, 각각 2만 7,000kW급 3호기와 4호기를 증설해 총 10만 8,000kW의 설비용량을 갖추고 연평균 326GWh의 전력을 생산하는 한편 홍수조절에 앞장서고 있다. 칠십 년 역사는 숫자에 불과할 정도로 여전히 현역이다.

 

– 원본글 : 수차와원자로 2014년 12월호 http://ebook.khnp.co.kr/Viewer/YKDWLTUMLBD0 

 

송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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