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전력사 탐험] 전력과 운송사업 결합으로 관광혁명 일으켜

  • 2015.03.03.
  • 1811
  • 블로그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금강산전기철도(주) 상편

전력과 운송사업 결합으로
관광혁명 일으켜

 

전차가 도시교통의 혁명을 일으켰다면 금강산 전철은 철도교통의 혁명을 일으켰다. 세계적인 영봉 금강산을 관광열차로 둘러볼 수 있었던 데에는 전력이 수반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금강산전기철도(주)의 설립배경과 금강산 전철 운영을 위해 함께 건설한 수력발전소들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전력사탐험

“일반 증기기관차로는 산악지대를 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강산 중턱에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전기를 생산해 운행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꿈을 꾸지요. 해발 1천m의 산 중턱을 지그재그로 달려 올라가면 눈앞에 1만 2천봉 절경이 아찔하게 펼쳐지곤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모래를 뿌리고 제동장치를 걸면서 내려왔어요. 그리고 내금강 중턱의 단발령 터널에는 전등이 188개나 달려 있었는데, 이 터널은 총 1,638m의 길이로 5분 동안 달렸습니다”
26년 전인 1989년 5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서 만났던 엄영섭 씨는 금강산 전철 운행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엄 씨는 금강산 전철 역무원으로 일했고, 필자와는 한국전력 사외보 취재 때 만났으니 그분이 생전에 계신다면 지금쯤 구순 (九旬)이 넘었을 것이다.

엄 씨는 18세였던 1941년, 7대 1의 높은 경쟁을 뚫고 금강산전기철도(주)에 입사해 해방 이듬해인 1946년까지 역무원으로 종사했다. 당시의 인터뷰 내용을 빌리면, 금강산 전철은 식당칸뿐 아니라 침대칸까지 갖춰진 호화 관광열차로서 매일 전차 4, 50대가 왕복 8차례 운행됐으며, 시발지인 철원에서 금강산까지 4시간씩 소요됐지만 연일 만원이었다는 것.
요금은 쌀 한 가마 값인 7원 65전이나 돼 아무나 타지 못하고 주로 일본인이나 중국인, 미국인들이 탔고, 한국인 중에는 아주 부자들만 탔었다고 했다. 당시 엄 씨의 월급은 24원으로, 월급 좋기로 소문난 면서기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어서 주변사람 모두가 부러워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흰 장갑을 낀 멋진 제복 차림의 역무원은 ‘신랑감 1위’여서 뭇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는 것. 그러나 엄 씨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만 이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것. 그는 분단만 되지 않았다면 역장은 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철원~내금강 116km 달리는 관광혁명의 꿈

전력은 모든 산업의 동력이다.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개화에 눈을 뜨며 산업을 일으킨 뒷받침은 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철도는 각각 도시교통과 철도교통으로 나뉜다. 도시교통의 경우 한성전기회사가 1899년 5월, 서울 시내 동대문~흥화문을 잇는 구간에서 전차를 개통한 것이 시초를 이룬다.
철도교통은 금강산전기철도(주)와 역사를 같이한다. 이 회사는 1921년 9월 철원~내금강 금강산선 부설공사를 시작해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를 잇는 28.8km 구간을 우리나라 철도 최초로 개통시켰다. 다시 말해 철원~김화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우리나라에 전기철도가 최초로 운행된 것이다. 당시 전기철도에는 직류(DC) 1,500V의 전력이 사용됐으며, 이후 1931년 7월 1일 철원~내금강의 116.6km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구간의 공사는 총 8회에 걸쳐 준공됐다.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1925년 12월 20일, 김화~금성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
•1929년 2월 9일, 창도~현리 •1929년 4월 15일, 현리~화계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 •1931년 7월, 말휘리~내금강

 

철도건설 전문가 쿠메(久米)와 화천강(花川江)의 기적

금강산 전철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에서 철도 건설사업으로 크게 돈을 번 일본인 실업가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에 의해 탄생되었다. 공학박사인 그는 1918년 금강산을 시찰하고 관광자원으로의 유망성에 주목한다. 그는 북한강 상류 화천(花川)의 큰 물줄기가 표고 500여 m에서 흐르고, 이 물줄기는 만폭동 계곡을 거쳐 백천동을 지나 회양 땅을 휘돌아 창도를 향해 남행하고, 마침내 화천(華川), 춘천 (春川), 가평(加平)을 지나 양수리에서 남한강을 만나 서해에 이르기까지 320km, 무려 800리 길을 흐른다는 것을 알고서 무릎을 쳤다. 그는 그을음이 나지 않고 힘 좋은 전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미 서울 한복판에는 전차가 활개 치며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기철도는 낯익어 있었다. 그는 화천(花川)의 큰 물줄기를 이용한 수력발전설비를 통해 전기를 얻을 수 있겠다는 야심을 갖게 된 것이다.

쿠메(久米)는 서울~원산까지의 경원선을 연계시키는 방법도 구상했지만, 증기기관차로는 험준한 산을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기철도를 통해 금강산을 관광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시켰다. 한반도의 동서(東西)간 지형 특성을 활용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거기서 얻은 전력으로 전기철도를 운행하면 내외국인이 관광지로 손꼽는 금강산 관광객의 수송뿐만 아니라 농업과 광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 재계와 철도 관계의 유력자 등의 동참을 얻어 ‘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 창립준비조합’을 구성, 조선총독부에 사업허가신청을 냈다. 이로써 금강산전기철도(주)가 태동하게 됐으며, 1919년 8월 11일 사업허가를 얻어 그해 12월 16일 동경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자본금 500만 엔(불입은 50만 엔)의 금강산전기철도(주)의 역사적인 탄생과 함께 초대 사장은 쿠메 자신이 되었다.

금강산-귀면암과 만물상의 겨울

[금강의 만물상. 쿠메는 금강산을 사찰하던 중 관광자원으로의 유망에 주목했고, 마침내 금강산전기철도(주)의 설립을 주도했다.]

 

쿠메의 철도공사 활동무대는 우리나라 경의선과 호남선 철도공사를 비롯해 일본 각 처와 대만까지 폭넓었다. 그가 만년에 가장 정열을 쏟았던 금강산 전기철도는 1931년 7월 1일 완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다음 호에 계속)

 

– 원본글 : 2015년 수차와 원자로 1월호 

 

송미화

0

댓글 남기기

블로그지기
블로그지기
한수원의 생생한 소식과 한수원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