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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전력사탐험ㅣ3차에 걸친 수력조사, ‘ 남농북공’ 정책의 비밀

  • 201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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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에 걸친 수력조사
‘남농북공’ 정책의 빌미

우리 근대사에서 수력발전은 뼈아픈 역사이다. 일제 강점이 본격화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에서 발전을 위한 수력자원 조사에 나섰다. 한반도는 북쪽에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 흘러 대수계(大水系)가 형성돼있고 협곡이 잘 발달되어 일찍이 부전강, 장진강, 압록강 등에 세계적 규모의 대수력 발전소가 개발됐다. 일제의 수력자원 조사는 결국 한반도를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으로 몰아갔다(편집자).

 

인류 최초의 문명은 모두 커다란 강을 끼고 발달했다. 사람들은 식수를 위해 물이 풍부한 곳으로 모여들었고, 농사를 짓거나 교통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강이 범람하거나 극심한 가뭄이 닥쳐도 자연의 조건에 대응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곧 산업발달의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물을 이용해 문명이 발달해왔음을 물레방아에서 엿볼 수 있다. 물레방아는 수차(水車)라고도 한다.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수차를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처럼 수차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수력발전은 산업발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3위용을 자랑하는 수풍댐수력 건설현장

 

[위용을 자랑하는 압록강 수풍발전소 건설 장면]

 

일제의 대륙진출 야욕과 3차에 걸친 수력자원 조사

근대 역사를 발달시켜온 숨은 주역은 단연 수력발전이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수력발전은 뼈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 속에서 개발된 수력발전소들은 그들의 대륙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세 가지 통치 방침을 세웠다. 첫째는, 조선을 영원한 농업국가로 통치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 당시 매년 400만~500만 섬의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을 조선에서 보충하자는 속셈이었다. 둘째는, 조선을 일본에서 만든 상품의 판매시장으로 통치하자는 것이었고, 셋째는 명치유신 이래 일본의 군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이들 군벌에 의한 대륙진출을 국가발전 계획으로 삼았던 것. 그들이 꿈꾼 대륙침략의 야욕은 만주와 시베리아 일부까지 포함되었으며, 한반도를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통치하자는 것이 속셈이었다.

이 세 가지 통치 방침을 세운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곧바로 한국 내의 발전을 위한 수력자원 조사부터 착수했다. 수력자원 조사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1차 수력자원 조사(1911~1914) 결과 총독부가 얻은 결론은 수력지점이 80개소였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이론발전량은 고작 5만7000kW로 추정했다. 이 가운데는 경제성이 있는 39개 지점도 포함돼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지도도 발행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수력발전기술도 하천의 자연 유수량으로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하천의 갈수량만을 조사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2차 수력자원 조사(1922~1929)에서 밝혀진 수력지점은 150개소로 늘었고, 포장수력(발전추정량)도 220만kW로 나타났다. 이렇게 막대한 수자원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토목기술의 발달에 따른 이른바 유역변경방식에 의한 발전공법 등 한층 진보된 기술을 조사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댐 축조방식의 수력발전이 대두된 시기였다. 2차 수력자원 조사 진행 중에 착수되었던 부전강에서의 유역변경에 의한 대규모 저수식 발전방식의 등장은 당시로선 매우 창조적인 독특한 기술이었다.

1부전강발전소가 위치한 장진강 지류 부전호 전경 이 호수
[2 부전강발전소가 위치한 장진강 지류 부전호 전경. 노구찌는 개마고원 중앙부에 위치한 부전령산맥을 끼고 잘 발달된 하천에 댐을 축조하여 6개의 발전소를 개발했다.]

일제의 ‘남농북공’ 정책이 불러온 80대 20의 비극

5만7000kW에 불과했던 1차 조사 때와는 달리 2차 조사에서 220만kW로 발전추정량이 늘어나자 일제는 조선의 통치방침을 일부 수정하여 종래의 농업국가로 통치한다는 것을 ‘남농북공 정책’으로 바꾸었다. 즉 한반도 지형적 특성상 평야가 많은 남쪽은 농업정책으로, 수자원이 풍부한 북쪽은 공업정책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1단계로 압록강수계의 장진강, 허천강 및 부전강 수력개발을 본격화하는 한편 함흥~흥남지역, 청진지역, 평양~진남포지역 및 신의주~다사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군수공업단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는 그 뒤 거대댐(大水系댐, High Dam) 축조기술의 진전 등에 영향을 받아 3차 수력자원 조사(1936~1945)를 실시했다. 그 결과, 154개 지점에서 밝혀진 포장수력은 총 644만kW였다. 이는 1차 조사 때의 110배 이상, 2차 조사 때의 약 3배에 해당하는 가능출력이다. 이처럼 수력자원 조사를 거듭할수록 발전추정량이 증가했던 이유는 개발방식의 전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나라는 지형상 거대댐을 축조하기에 적합한 지점이 많았다. 대용량저수지 방식의 댐은 수풍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유역변경방식은 장진강발전소와 부전강발전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어쨌든 일본은 1910년대와 1920년대, 그리고 1930년대 이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수력자원 조사를 실시했고, 동시에 포장수력의 27.1%에 해당하는 174만4800kW의 수력을 개발했다. 이미 개발된 29개 지점 외에 당시 공사 중이었던 곳이 10개 지점이었고, 발전량은 134만6700kW였다. 이는 포장수력의 20.9%에 해당하는 양으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었던 1945년 당시 전 포장수력의 48%가 개발되었거나 개발 중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 포장수력자원의 80%가 북한에 편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펼친 남농북공 정책이 원인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양단된 남북간에 전력공급의 심한 불균형을 가져다주었고, 우리 전력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었던 5.14 단전으로까지 치닫는 비극을 초래했다. 북의 일방적 단전 조치로 말미암아 북한으로부터 80%의 전력을 공급받았던 남한은 일대 암흑천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전원개발에 총 매진함으로써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발전량을 따라잡기 시작했고, 광복 70주년을 맞은 오늘날에는 남과 북이 대역전 현상을 보이고 있다.

– 원본글 : 수차와원자로 2015년 3월호 

송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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