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어렸을 때의 기억은 언제부터 사라질까

  • 2017.02.21.
  • 2903
  • 블로그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어릴 적 전북 군산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당시 집 근처에는 야구 명문 군산상고가 있었고, 네 살이던 나는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즐겨 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랬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내게는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단지 상상하며 마음에 그려볼 뿐이지 사실 그 때의 기억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반갑게도(?) 사람들은 어릴 적 일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 한다. 이처럼 아동기 초기의 기억이 없는 것을 ‘아동기 기억상실’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아이들은 이 시기에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갖고 있는 점이다. 부모라면 한 번쯤 ‘우리 아이가 혹시 영재 아닐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어린이의 기억력은 탁월하다. 아동기 기억에 관한 역설적 상황을 두고 오래 전부터 활발한 과학적 논쟁이 있어 왔다.

 

기억, 어린이, 뇌, 한국수력원자력, 한수원, 기억상실

 

어린이의 기억은 언제부터 사라지는 것일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에서 사람들은 2-3세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3-7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매우 일부만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처음 숟가락을 사용했던 일이나 기저귀를 떼던 일은 아예 기억이 안 나지만, 유치원에서 갔던 소풍이나 성탄절에 받은 선물은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신감과 달리 과거는 종종 잘못 기억된다. 과거 연구들의 한계점을 넘어서기 위해 미국 에모리 대학교의 바우어와 라르키나 교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연구를 시행했다. 먼저 이들은 3살 어린이와 엄마가 가족 캠핑, 사촌의 방문, 생일 파티와 같은 최근 일들에 대해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 이후 6년 동안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특정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를 매년 살펴봤다.

그 결과 어린이가 7살까지는 3살 때 있었던 일의 60% 이상을 기억하는 반면에 8, 9살 어린이는 기억하는 정도가 40%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동기 기억상실이 이 2년 사이게 급속하게 진행됐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들의 다른 연구에서는 어린이가 11세에 이르면 성인과 비슷하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하면 아동기 기억상실은 시간에 비례해 잊는 형태로 나타나는 성인의 망각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아동기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1세기 전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드가 어릴 적 심리적 외상을 억압하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 이래 여러 이론들이 제시돼 왔다. 한 때는 어린이에게 기억 생성에 필요한 자아 개념이나 언어 습득과 같은 발달 과정이 채 이뤄지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됐었다. 하지만 원숭이나 쥐에게서도 아동기 기억상실이 관찰되기에 좀 더 보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어릴 때 뇌에서 빠른 속도로 생성되는 신경 세포가 아동기 기억상실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뇌에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기억을 만드는 곳이 해마인데, 과거에는 더 좋은 기억력을 갖기 위해 신경 세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부부 교수인 조슬린과 프랭크랜드의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뇌에서는 반대의 현상도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연구진은 실험적 조작을 통해 새끼 쥐와 어른 쥐에서 해마의 신경 세포가 자라는 속도를 조절했다. 그 결과 새끼 쥐에서 신경 세포의 성장을 늦추자 기억이 오랫동안 유지된 반면에 신경 세포 생성이 증가한 어른 쥐는 기억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아동기 초기에 기억 회로의 증설을 위해 신경 세포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질 때 오래된 기억을 저장하는 기존 회로가 방해를 받으면서 아동기 기억이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 기억은 아동기를 거치는 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흔히 감정이 섞여있는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데 어릴 적 기억도 그럴까? 미국의 피터슨 교수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뼈가 부러지거나 깊게 베인 상처 등으로 응급실을 방문한 3-5살 어린이를 2, 5, 10년에 걸쳐 추적하면서 이들의 기억을 살펴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 가장 공포스러운 기억 중 하나가 다쳐서 병원에 갔던 것이지 않은가.

어린이는 10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 등의 내용을 70% 정도 기억했고 부상과 관련해 약 45가지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떠 올렸다. 그러나 부상당한 기억에 비해 병원에서 치료 받은 기억은 부실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억이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두 기억이 다른 방법으로 다뤄지는 것을 원인으로 추측했다. 즉 부상당한 일은 가족과 지인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기억의 강화로 이어졌지만, 병원에서 경험한 일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다뤄지면서 일반적인 기억들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억 자체의 내용이나 연관된 감정이 아동기 기억을 견고하게 만드는 요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4-13세의 어린이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 세 가지를 묻고 2년 뒤에 확인한 피터슨 교수의 다른 연구에서도 첫 기억들은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었다. 프로이드가 언급했던 것처럼 심리적 외상도 아니었고, 강렬한 감정이 실려 있는 기억도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환경적 요소가 아동기 기억상실에 관여하는 것은 아닐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어릴 적 기억을 더 많이 갖고 있거나, 국가에 따라 가장 오래된 아동기 기억이 언제부터인지가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 집단에서는 이런 환경적 영향이 관찰되지 않으며 이전의 결과는 연구 방법 상 허점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동기 기억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에 대해서는 향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아동기 때 깡그리 잃어버린 기억을 왜 굳이 궁금해 하고 연구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동기 기억상실의 과학적 기전이 밝혀진다면 여러 불안장애에 동반되는 나쁜 기억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식으로 임상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설령 당장은 그렇지 못 해도 어릴 적 기억을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음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지 않겠는가. 연휴가 많은 5월, 어릴 적 기억을 찾아 군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겠다.

글 :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3

블로그지기
블로그지기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