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ㅣ영남일보 기획연재ㅣ 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 제1화

  • 2013.12.12.
  • 797
  • 서 홍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img_1386653394540

 

(1)기적의 에너지 박스, 대한민국 原電의 여명을 열다

“이 작은 상자 속 우라늄이 석탄 250만배 에너지라니…”

이승만 대통령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원자력은 인류 최고의 발견인 불과 전기에 이어 ‘제3의 불’이라고 일컫는다. 국내의 주요 전력 에너지원으로,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경주의 월성원전은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어 온 한국 에너지의 심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 월성원전은 국내 유일의 중수로 원전으로 한국 원전사에서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3년 4월, 1호기 준공을 계기로 국내 원전연료 공급원의 다각화와 함께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본부와 공동으로 스토리텔링 시리즈 ‘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부제 : 경제발전을 이끈 원자력 이야기)을 연재한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 원자력 발전사를 돌아보고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본다. 또 한국 경제발전을 이끌고 원자력 에너지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월성원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재조명한다. 시리즈 첫 회는 한국 원자력 발전의 도화선이 된 ‘시슬러와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1. 시슬러의 마법 같은 나무상자

 접견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1956년 7월의 어느 날 오후였다.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양유찬 주미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집무실로 들어선 자는 흰색 여름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은발의 서양 노신사였다. 훤칠한 체구에 중후한 인상,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중절모자를 벗어든 노신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한국식 인사를 건넸다. 악수를 청하는 대통령의 노안(老顔)에 반가움의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오. 미국에선 언제 돌아오셨소?”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예방한 자는 시슬러(Walker Lee Cisler)란 미국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즈음에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전후 유럽의 전력계통의 복구를 총지휘하고 성공리에 임무를 마무리해 ‘세계 전기기술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또한 세계에너지협의회(WEC) 의장, 에디슨 전기협회 회장, 미국원자력산업회의 의장을 역임한, 세계 에너지계의 거물이자 원로였다. 아울러 미국의 유명한 전력회사인 디트로이트 일렉트릭 컴퍼니(Detroit Electric Co.) 사장이기도 했다.

 “그래, 오늘은 어떤 주제를 갖고 찾아오셨소?”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고 각자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이 대통령이 물었다.

 평소 시슬러는 약소국의 에너지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광복 후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한국의 열악한 전력사정과 에너지 문제에 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연유로 시슬러는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 대통령을 예방하여 한국의 에너지 대책과 전력사업 전반에 대하여 폭넓은 의견을 개진해 왔던 터였다. 작년(1955) 12월에 있었던, 주미대사 양유찬과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월터 로버트슨이 양국을 대표하여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협력을 위한 협정’에 비준한 일도 따져보면 역시 시슬러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시슬러가 곁에 놓아둔 가죽 가방을 열었다. 이 대통령이 신뢰와 호기심에 깃든 눈길로 시슬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시슬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는 사실 각별한 데가 있었다. 개인적 친분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한국 정부에 끼친 시슬러의 도움이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시슬러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에 있었던 5·14 단전사태 때였다. 광복 직후만 해도 남측(남한)의 전력 자급률은 4%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전력 발전시설은 북측(북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남북의 분단은 점차 고착화되어 갔고, 마침내 북한은 남한에 큰 타격과 정치·사회적 혼란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남한에 대한 전력송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5월14일 정오 무렵이었다.

 졸지에 남한은 유례 없는 대규모 정전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도로 위의 전차는 멈춰 섰고, 공장은 생산시설 가동을 중단했다. 그야말로 비상시국이었다. 당시에 업무 차 내한했던 시슬러는 비상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응급처방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발전함(發電艦) 2척을 급파해 주도록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곧 자코나(Jacona/20,000㎾) 발전함이 부산항에, 엘렉트라(Electra/6,900㎾) 발전함이 인천항에 들어와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시급한 전력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6·25전쟁 중에는 태부족한 전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발전함을 긴급 구입하도록 주선한 바도 있었다.

 시슬러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한 뼘 크기의 갈색 나무상자였다. 이 대통령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늘어졌다.

 “저는 이것을 에너지 박스라고 부릅니다.”

 짧게 대답한 시슬러는 마법사나 되는 것처럼 상자를 탁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이 작은 상자 안에 든 것은 3.5파운드의 우라늄입니다.”

 “우라늄이라고요?”

 곁에 있던 양 대사가 반문했다.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원자력 원료인 우라늄입니다. 그럼 이 우라늄이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간단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이 상자에 동일한 무게의 석탄이 들었다고 가정하고, 그걸 원료로 하면 전기 4.5 kWh를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자의 우라늄을 원자로(고속증식로)에서 태운다면 자그마치 1천200만 kWh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즉 석탄의 250만 배가 넘은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셈입니다.”

 듣고 있던 이 대통령과 양 대사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석탄의 백배나 천배도 아닌 무려 250만 배의 에너지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만약 사실대로면 세상의 모든 에너지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놀라운, 가히 기적의 에너지나 다를 바 없었다. 집무실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생각을 가다듬던 이 대통령의 얼굴에 결의의 빛이 스쳐갔다.

 “좋소. 시슬러씨. 그럼 앞으로 우리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하려면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소?”

#2. “원자력은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

 그 다음해인 57년에 시슬러는 자칭 ‘에너지 박스’를 들고 조선전업과 서울대학교를 돌아다니며 500여명의 젊은 기술자들과 1천여명의 학생에게 원자력 이론을 설명했다. 동시에 사회적 발전에 따른 미래의 에너지원으로서의 가능성과 기여하는 바에 대해 역설했다.

 “한국은 결코 자원빈국이 아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다. 우라늄 1g은 석탄 3t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가난하지만 인재가 많은 한국으로선 무엇보다 사람의 머리에서 캐낼 수 있는 에너지를 적극 개발해야 한다.”

 ‘에너지의 장래문제와 전기에너지’란 주제로 열린 그의 강연은 많은 기술자와 학생에게 원자력에 대한 폭넓은 과학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원자력은 대량살상무기로서의 인식이 강했던 시기였다.

 인류 역사에서 원자력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면서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가공할 파괴력과 살상력은 끔찍한 공포로 인류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이러한 원자력의 위력이 공포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으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8년이 지난 53년이었다.

 당시 UN총회에 참석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선언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창설을 강력하게 제창했다. 아울러 원자력을 농업과 의학 등 평화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전문가를 활용하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의 모든 에너지 빈곤국에 풍부한 전력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도록 우라늄과 핵물질 보유국가 간의 협력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계기로 세계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을 서둘렀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원자력협정 체결이 이어졌다. 55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 전부터 이미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강대국의 평화적 원자력 이용에 대한 연구는 물밑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54년 6월에는 소련이 세계 최초의 원전인 5㎿급 흑연감속형 원자로 오브닌스크(Obninsk)를 가동했다. 미국은 원자력을 동력원으로 한 노틸러스(Nautilus, 세계 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호를 개발함과 동시에 이를 전력생산을 위한 발전용으로 개조한 100㎿급 가압경수형 원자로인 ‘쉬핑포트(Shipping Port)’ 원전 건설에 착수했다.

 뒤이어 영국과 프랑스, 중국도 잇따라 핵실험에 뛰어들었고, 영국은 56년에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60㎿급 기체 냉각로인 콜더 홀(Colder Hall) 1호기를 가동시켰다. 세계는 바야흐로 원자력개발에 대한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행스럽게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선구적이며 우호적인 시슬러의 조언을 받아들인 이승만 대통령은 56년 3월 대통령령으로 원자력 발전을 위한 전담기구와 원자력 연구소의 설립, 관계법 제정, 그리고 인재양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의 연구개발 및 이용을 위한 행정부서로서 원자력과가 신설되었고, 초대 원자력 과장으로 당시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교수인 윤세원이 임명되었다. 이어 58년 3월에 법률 제483호로 원자력법이 제정되었고, 59년에는 원자력 정책을 집행할 기구인 원자력원(院)이 만들어졌다.

 이에 앞서 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마침내 원자력발전을 위한 역사적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과 시슬러의 만남과 그에 따른 결단이 없었다면 한국의 원자력발전은 요원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0

코멘트(1)

댓글 남기기

서 홍기
서 홍기
2002년 한수원 입사 월드컵 4강 인재개발원에서 봤어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