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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영남일보 기획연재ㅣ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 제4화

  • 20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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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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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수로 원전 부지, 내포에서 월성으로 급선회

 

“동해 낀 陵谷지역, 최적 입지 찾았다”… 지지부진하던 중수로 원전 본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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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로 도입, 본궤도에 오르다

 영하의 바깥 날씨와 달리 난방이 잘 된 회의실 내부는 따뜻했지만 좌중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디귿자로 배치된 회의실 탁자에 빙 둘러앉은 원자력부 중견간부들은 불과 며칠 전, 그러니까 올해(1976년) 1월 초에 새로 부임해온 김영준 한전사장의 의지에 찬 눈길에 부담을 느낀 듯 대부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인화(人和)를 한전의 새 사규(社規)로 제정할 만큼 친화력이 있는 김 사장은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일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러니까 중수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국회를 비롯하여 정부 고위관료들 사이에서도 경수로에 비해 절차도 까다롭고 가격이 비싼 캐나다 중수로를 애써 구입할 필요가 무엇이냐, 그런 말들이 나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김 사장의 질문에 전재풍 계약담당 과장이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재풍 과장은 신임사장으로 부임한 김영준에 대한 소문을 웬만큼 들어 알고 있었다. 사업차 벨기에에 가 있던 그가 제6대 한전사장으로 전격 발탁된 배경에는 장례준 상공부장관과 특별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정부에서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이 산 때문이라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가 30년 남짓한 공직생활을 마치고 기업체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부실기업으로 알려진 흥한화섬(현 원진레이온)과 동신화학을 단기간에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문희성 차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문희성은 1966년경 한국에 처음 원자력과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원자력과장을 맡은, 한국 원자력계의 초석을 다진 인재였다. “개인적으로 중수로 도입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가격에 비해 장점이 많은 원자로입니다. 그건 저와 함께 캐나다 캔두 조사단에 참여했던 노윤래 과장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김영준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수로 도입 과정상의 문제점과 어려움, 현재의 상황을 부임한 뒤 며칠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던 바였다. 그에 따르면 최형섭 과기처장관과 이창석 차관, 이병휘 과기처 원자력국장, 한전 기술이사이자 한국원자력기술<주>의 초대소장인 김종주 씨와 윤용구 원자력연구소 소장 역시 중수로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측이었다.

 지금 김영준 사장의 요청으로 열리고 있는 한전 원자력부의 회의는 조만간 완공을 앞두고 있는 고리 1호기를 비롯하여 작년(1975) 5월 하순에 캐나다 오타와에서 신기조 당시 한전사장(직무대행)의 노력으로 건설차관이 확정된 월성 1호기에 대한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캐나다에 조사단이 다녀간 뒤인 1973년에 한전으로부터 구매의향서를 접수한 캐나다원자력공사는 그해 12월 초에 전력회사 사장이 직접 내한하여 공급계약 추진방향을 협의했다.

 1974년부터는 캐나다원자력공사와 한전의 공급계약이 본격화됐다. 월성 원자로 인·허가 기준으로는 캐나다 하이드로 퀘벡(Hydro-Quebec)사가 제작한 노형(爐型)인 젠틀리 2호기(60만㎾급의 가압중수로)를 공급받기로 양측이 합의하였다. 사업에 필요한 차관 도입에 관해서는 캐나다 측이 1973년 10월에 캐나다수출공사(EDC) 총재를 한국으로 보내서 정부 및 한전에 양질의 차관공여를 약속한 바 있었다. 또한 공급범위와 기술사양, 가격조건, 공정, 기술훈련 등에 관한 통상적인 계약조건 외에도 보증사항 등의 몇 가지 주요 문제점들은 협상을 거쳐서 결정을 보았다. 그해 3월에는 IAEA의 주선으로 내한한 4명의 전문가들이 6주간에 걸쳐서 계약내용을 면밀히 검토하기도 했다. 곧 중수로 건설이 가시화될 듯 보였다.

인도 비밀 핵실험에 놀란 美

한국에 NRX 주지 말도록

캐나다 정부 고강도 압박

“순수 발전 목적으로 도입”

김영준 사장 집요하게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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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오해를 떨쳐내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을 일삼던 인도가 1974년 5월에 비밀리에 핵실험을 강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핵실험에 캐나다가 공급한 NRX형 실험로인 CIRUS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연료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이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 사건의 여파는 곧장 캐나다와 중수로 협상 중이던 한국에도 미쳤다. 미국은 인도의 핵 지원을 중단하는 한편으로 캐나다가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제공하겠다던 실험용 원자로인 NRX를 주지 말도록 캐나다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원전 도입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고, 몇 번의 계약 변경을 거친 끝에 1974년 12월, 민충식 당시 한전사장이 직접 캐나다로 가서 가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다음해인 1월22일에는 정부의 추인 아래 정식계약이 이루어지면서 겨우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급선과의 협의과정에서 터빈발전기와 주변압기 등 옥외변전설비 공급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약속한 영국 측의 반발을 비롯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서 월성 1호기 도입사업은 차일피일 미뤄지는 형편이었다.

 “그러면 지금 원전사업의 제일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현재로선 아무래도…미국의 압력일 듯싶습니다.” 김 사장의 우측에 앉아 있던 최장동 기술개발과장이 대신 대답했다.

 “음, 그렇군요.” 김 사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항간에는 박 대통령의 야심이 미국을 자극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핵연료분야의 권위자인 주재양 박사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도 소문의 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작년에 국회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비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믿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문 차장의 대답을 들으며 김 사장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바깥을 바라보던 김 사장이 고개를 돌려 좌중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결연한 의지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情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이 세상에 사람이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앞장서서 열심히 원전사업을 추진할 테니 여러분께서도 힘껏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하는 원자력사업이 비단 우리 세대뿐 아니라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믿어 마지 않습니다.”

 김영준 사장의 결단이 있은 지 바로 이틀 뒤인 1976년 1월16일, 드디어 김주영 캐나다 대사와 캐나다수출개발공사 총재 입회 아래 월성 1호기 건설차관 변경계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한국과 캐나다 간에 원자력 평화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이 포함되었다.

 그 이후에도 김 사장은 직접 청와대를 방문해 원자재 값 폭등으로 중단된 고리 1호기 공사에 추가비용을 지불하도록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내는 것으로 밀렸던 난제를 해결했다. 뒤이어 그는 당시 핵문제로 한국에 파견 나와 있던 미국 국무부 관리들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국은 순수발전 목적으로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이라며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미국 측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최적의 입지를 찾아라

 원래 국내 최초 가압중수로 원전 1호기가 들어설 장소로는 1974년 10월에 경남 창원군 진동면 내포리가 예정돼 있었다. 농업진흥공사에 위탁하여 용수원 조사사업도 마치고, 직원을 위한 임시막사도 설치된 상태였다.

 하지만 정부의 건설 허가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1975년 봄이면 건설사무소가 본격적으로 꾸려진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일은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문제는 예정부지인 내포리의 안전성 때문이었다.

 원래 원전부지는 안전성과 경제성 두 가지를 고려하여 선정하도록 돼 있었다. 안전성 면은 부지의 지반, 기상 상태, 해수와 지하수의 흐름, 지형과 인근의 인구 분포 등을 철저하게 따져봐야 했다. 특히 원전부지로 적합하려면 지하 암반이 균질암이어야 하고, 8㎞ 이내에 활성단층이 없어야 하며, 반경 7㎞ 이내의 주민수가 2만5천 명 이하여야 했다.

 경제성 면에 있어서는 냉각수 확보 문제, 교통수단(300t 이상 중량물 운반 가능여부), 부하중심지로부터의 거리, 부지 소요면적과 구매가격, 부지조성비용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했다. 하지만 예정부지인 내포리의 재조사 결과 지질기반이 약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여기에 건설 허가조건으로 대통령 재가와 함께 국방장관, 해군참모총장의 결재가 나야 했다. 하지만 뒤늦게 내포리 원전건설 사실을 알게 된 해군참모총장은 해군특수기지 앞에다 원전을 세울 수 없다는 반대의견을 표했다.(당시 한전 내포건설사무소 공무계장인 오용식의 증언).

 이처럼 철저하고 복합적인 기초조사를 거친 끝에 1975년 4월 월성군 양남면 나아리가 국내 최초의 중수로인 월성 1호기 새 부지로 확정되었다. 경주시 양남면은 경주시 동남부에 위치하며 남쪽은 울산시 북구와 서쪽은 외동읍, 북쪽은 양북면에 접하고 동해(해안선 11.5㎞)를 낀, 야산과 논밭, 구릉으로 이루어진 능곡(陵谷)지역이었다. 안전성과 경제성을 고려했을 때 원전부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마침내 1975년 10월에 양남면 나아리에 월성원전 건설사무소가 설치되고, 부지 63만평(208만여㎡)에 대한 매입과 200여 가구에 대한 주민이주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캐나다 원자력공사 총재인 그레이 박사가 내한한 1973년으로부터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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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참고문헌=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한국전력기술 30년 : since 1975년, 한국전력공사 발간 살아있는 전력사-누리를 밝혀 온 한세기, 차종희 저 영광과 탁마의 세월 : 원자력과 함께 30년, 한국원자력산업연구원 발간 한국원자력산업연감, 박익수 저 한국원자력창업비사

* 사진설명

 <본문사진1> 1976년 5월3일, 캐나다와 국내 기술진이 월성 1호기 부지의 지질을 조사하고 있다. 원래 중수로 원전 1호기는 경남 창원군(창원시) 진동면 내포리에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면밀한 조사 끝에 안전성과 경제성을 모두 갖춘 월성군(경주시) 양남면 나아리가 최종 원전부지로 선정된다. (월성원자력본부 제공)

 <본문사진2> 1976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월성 1호기 부지. 주민들이 살던 집이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1975년 10월 양남면 나아리에 월성원전 건설사무소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주민 이주가 이뤄졌다. (월성원자력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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