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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영남일보 기획연재ㅣ 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 제2화

  •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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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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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새로운 도전, 중수로 원전

외국도 만류하던 ‘停戰상황 속 대형원전 건설’

앞을 내다본 朴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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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로 검토하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지시

 1973년 5월의 어느 날. 이틀간 내리던 비가 그친 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최형섭(崔亨燮) 과기처장관의 요청으로 급작스레 이뤄진 오후 회동은 정부청사 별관 소회의실에서 있었다.

 나른한 바깥 날씨와 달리 실내에는 긴박한 기운이 떠돌았다. 널따란 진갈색 호두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사람은 최 과기처장관을 비롯해 국방과학연구소의 현경호(玄京鎬) 박사, 한전 원자력부 문희성(文熙晟) 차장과 대통령 경제2수석인 오원철(吳源哲),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원자력청장도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으나 외국에 출장을 간 관계로 제외됐다.

 그들의 회동은 오전에 한 차례 전화 연락을 받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캐나다의 중수로형 원자로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하루속히 연구,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최 장관에게 내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돌연한 지시는 보름쯤 전인 4월에 한국을 방문한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Atomic Energy of Canada Limited) 총재인 그레이(J.L. Gray) 박사와 연관돼 있었다.

 내한한 그레이 박사는 청와대와 상공부, 과학기술처, 한전 등을 차례로 방문해 캐나다가 새롭게 개발한 가압중수로형 원자로(CANDU Reactor: Canada Deuterium Uranium Reactor)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장점을 소개했다. 아울러 한국의 ‘장기전원개발계획’의 원자력개발 분야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강력하게 밝혔던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 아침 국무회의에서 있었던 박 대통령의 긴급지시는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레이 박사의 요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경수로인 고리 1호기의 건설이 한창인 지금, 무슨 이유로 캐나다의 중수로에 대한 갑작스러운 연구, 검토지시를 내린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각하께서도 중수로 건설 비용이 경수로에 비해 약 14% 높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저도 그 점을 각하께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문 차장의 질문에 오 경제2수석이 대답했다. 사실 문 차장이 속한 한전 입장에선 중수로 건설 계획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막 경수로 건설로 시작된 원자력발전에 다시 새로운 타입의 원전을 시도하는 작업은 한전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었다.

 “국내의 현실상 중수로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예전 ‘가스냉각로 사건’처럼 미래 원자력 사업에 큰 낭패를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현 박사의 말에 세 사람 모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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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타격 될 뻔한 ‘가스냉각로 사건’

 속칭 ‘가스냉각로 사건’은 다들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처음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국내에 어떤 종류의 원자로를 들여올 것인지 고민하던 1968년 무렵이었다.

 당시 건설되던 원자로의 종류로는 ‘경수로’로 통칭되는 가압 경수로와 ‘비등수로’로 부르는 가압 비등수로, 그리고 자본주의국가 중에서 영국이 제일 처음으로 개발한 발전용 원자로인 ‘가스냉각로’가 있었다.

 경수로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앤윌콕스사 등에서 제작했고, 비등수로는 제너럴일렉트릭(GE)사가 제작했다. 가스냉각로는 영국의 원자력수출공사(British Nuclear Export Executive)에서 생산했다.

 핵연료와 냉각수가 직접 접촉하는 비등수로(후쿠시마 원전이 바로 이 비등수로임)는 안전상 조기에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경수로와 가스냉각로가 남았을 때 원자력 연구소 연구원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영국에서 유학한 연구원은 가스냉각로를 선호했고, 미국에서 유학한 연구원은 경수로를 지지했다. 양측의 대립은 예상외로 팽팽했다.

 외견상 우세를 보인 건 영국제 가스냉각로였다. 그 당시 가스냉각로는 세계에서 제일 수출이 잘 되고 있던 원자로였고, 가까운 일본에도 이 원자로를 수출했던 것이다. 이런 세계적 수출 실적의 이면에는 이름난 무기중개상이었던 독일계 유대인인 숄 아이젠버그(Shoul Eisenburg)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이 외국의 차관을 들여와 호남비료, 동해화학, 인천 제철을 비롯한 주요 기간산업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아이젠버그의 놀라운 중개력 덕분이었다. 대한(對韓) 영향력이 대단한 아이젠버그가 영국의 가스냉각로를 팔기 위해 각처에 영향력을 발휘하자 유력한 정치인들은 자연스레 가스냉각로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자 경수로를 지지하는 측에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미국의 원자력발전 시장은 매우 크며, 단지 미국 내의 원자로 건설이 바쁜 탓에 대(對) 외국 수출이 적을 뿐이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원자로인 경수로를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자 부흥부의 태완선(太完善)장관은 중립적인 인물에게 선택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 인물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하웰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에서 가스냉각로에 대해 공부하고, 미국 MIT에서 경수로에 대해 연구한 바 있는 김종주(金鍾珠)씨 였다. 또 그는 한국전력의 기술이사이기도 했다.

 처음 그가 원자력에 관심을 가진 것은 57년에 내한한 미국의 원자력 전문가 시슬러가 조선전업 강당에서 행한 원자력 강연을 들은 후였다. 당시 그는 미래의 전력 산업에는 원자력발전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임무를 맡은 김 기술이사는 곧 미국산 경수로가 우수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를 받아들인 태 장관이 미국의 경수로를 택하면서 아이젠버그가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 일로 인해 김 이사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아이젠버그의 분노를 잠재우지 않다간 한국의 기간산업 전체에 타격이 올 수도 있었다. 김 이사는 다음 차례 구매를 약속하며 어렵사리 아이젠버그의 화를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리 1호기를 경수로로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웨스팅하우스를 최종 계약자로 선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영국제 가스냉각로에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놀란 영국 정부는 곧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고, 문제가 된 부품은 리콜 조치했다. 그 사건 이후로 잘 나가던 가스냉각로는 세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미국산 경수로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만일 그 당시에 잘못된 판단으로 영국제 가스냉각로를 택했다면 신생기의 한국 원자력 산업은 큰 타격과 혼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로 인해 발생되는 기회비용의 상실은 겨우 싹을 틔우기 시작한 전후의 한국 경제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을 터였다.

◆ ‘캐나다 중수로’ 실사 결정

 “물론입니다. 고리 1호기 건설계획 시에도 전력 설비용량 계획을 잘못 결정했다면 앞날에 큰 수급 불균형을 가져올 뻔했지 않았습니까. 시쳇말로 만사불여튼튼이라고, 이런 큰 계획일수록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문 차장이 덧붙였다. 문 차장이 말한 건설계획의 내용은 이랬다. 박정희정부는 고리 1호기 설비용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처음엔 15만㎾에서 20만㎾, 다시 30만㎾에서 50만㎾로, 나중엔 58만㎾로 점차 늘려갔다. 그것은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술조사단으로 방한한 루리 크린(Ruri Kryun) 경제 분석 전문가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크린은 말했다.

 “한국에 건설할 원자력발전소의 용량을 지금 기준으로 결정해선 안된다. 한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이는 곧 미래의 전기소비 급증을 의미한다. 원자력발전소는 계획에서 건설, 가동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 지금 시점에서 전력 설비용량을 기준삼아 원자력발전소의 시설용량을 결정짓지 말고 10년 후에 사용할 전력량을 기준으로 원자력발전소의 시설용량을 결정해야 현명한 계획일 것이다.”

 루리 크린의 조언에 따라서 정부는 회의를 거쳐 원전 용량을 30만㎾급에서 60만㎾급 3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그런 초대형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는 건 무모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한국은 언제 어느 때 전쟁이 시작될지 모를 위험한 정전(停戰) 체제로 있었다. 게다가 1968년의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와 북한 해군에 의한 미국 정보함인 푸에블로호의 나포사건, 69년에 있었던 북한 공군기의 미 공군 EC-121기의 미사일격추사건 등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터에 대형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외국에서조차 반대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에 개의치 않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강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앞날의 경제 발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력수요에 대비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캐나다의 원전 건설 현황과 시설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미 인도나 파키스탄, 아르헨티나가 캐나다 중수로를 보유했거나 원전을 건설 중에 있고, 이란과 루마니아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 박사의 말을 들은 최 장관이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일단 조사단을 캐나다로 보내기로 결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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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사진=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본부 제공

* 사진설명

<본문사진1>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중수로형 원자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중수로 도입을 검토하던 에너지 관료들은 중수로의 주요 수출국인 캐나다 원전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조사단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1979년 6월, 바닷길을 통해 경주시 양남면에 도착한 대한민국 최초의 가압중수로형 원자로가 화물선 해피러너호에서 특수운반차로 옮겨지고 있다.

<본문사진2> 정전(停戰)체제인 대한민국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매우 위험한 일로 간주됐지만, 전력수요 증가에 대비하려면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979년 9월 월성 1호기의 핵심인 가압중수로형 원자로가 엔지니어들에 의해 조립되고 있다. 월성 1호기는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사용, 농축우라늄을 사용하는 경수로에 비해 외화부담을 줄일 수 있고 미국 이외의 우방국가로부터 연료 구입이 가능하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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