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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이 오히려 천재의 증거?

  •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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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독서는 작업의 일부일 만큼 중요하다.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역시 서가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선택해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알지 못했던 사실이나 훌륭한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거나 요점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미 누군가가 자기와 똑같이 표시해놓은 것을 보곤 깜짝 놀란다.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표시가 바로 자신이 예전에 한 것임을 매번 알게 된다. 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 마지막에 실려 있는 에세이에 나오는 ‘문학 건망증’에 관한 내용이다.

건망증에 관한 일화로는 세계적인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기차를 탄 그는 역무원이 차표를 검사하러 다가오자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가방까지 뒤져도 차표는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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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은 건망증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기억의 취사선택 과정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 Pixabay public domain

그때 아인슈타인을 알아본 역무원이 차표가 없어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을 차표를 꼭 찾아야 한다고 우겼다. 역무원이 찾을 필요가 없다고 재차 말리자 아인슈타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에 가는지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집으로 가는 길을 종종 잊어버려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곤 했다. 또한 자기 집 전화번호도 평생 외우지 못해 어쩌다 집에 전화를 걸려면 전화번호부에서 찾아야 했다.

망각은 매우 정상적인 정신작용

여기 이들과 정반대의 사례가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바로 그것. 소설 속 주인공인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진 뒤 완벽한 기억력을 얻은 농부다. 그는 포도나무에 달린 모든 잎사귀와 포도알의 수를 지각하며, 몇 년 전 어느 새벽의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

흔히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반면 망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또 기억과 관련된 단어는 매우 창의적인 반면 망각에 관한 단어는 대개 수동적이며 파괴와 닮아 있다. 그럼 과연 푸네스는 긍정적인 삶을 살았으며 아인슈타인보다 창의적이었을까.

작가인 보르헤스는 푸네스에 대해 정반대의 시각을 지닌다. 푸네스는 영어와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만, 작가는 정작 그가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개념화시키는 것이지만, 푸네스의 풍요로운 기억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것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지하주차장에 가서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찾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갑자기 지난 몇 년간의 주차 장소가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서 기억난다면 난감하지 않을까. 오늘 주차한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과거 어디에 주차했는지는 지워버리는 게 유리하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의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면 인간은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즉, 망각은 매우 정상적인 정신작용이며 반드시 필요한 정신작용이기도 하다. 미국 소설가 숄렘 에쉬가 ‘우리 실존의 필수 조건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이 수년 동안 건망증과 지능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 그 결과 건망증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기억의 취사선택 과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에 의하면 기억과 행동을 조절하는 뇌 측두엽의 해마는 유용한 기억들만 남기며 불필요한 단순 기억은 버리는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건망증은 해마에 중요한 정보가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맥락에서 건망증은 오히려 뛰어난 지능의 반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연구진의 주장이다.

건망증은 치매와 전혀 무관한 증상

사실 기억의 궁극적 목적인 푸네스처럼 모든 정보의 저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 순간에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도 기억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건망증을 유발하는 요인은 피로와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치매와는 전혀 무관한 독립적인 증상이므로, 나이가 들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건망증은 치매처럼 신경세포의 손실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건망증이 심했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던 계기는 ‘몽상’이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자신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빛 위에 올라타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했다. 만약 빛과 자신이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 빛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몽상과 사색은 가끔 놀라운 창조적 해법을 제시한다. 몽상을 하는 과정에서 기억이 통합되면서 비선형적 연결을 통해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신경영상학적 연구에서 몽상 중에는 뇌가 여러 영역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대처럼 근무시간이나 보고서 같은 측정가능한 결과물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몽상이나 사색이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행동이 실은 가장 생산적인 행동일 수 있다. 가득 채우는 것보다는 때때로 비우는 것이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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