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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영남일보 기획연재ㅣ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 제8화

  • 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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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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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너지심장 월성원전

(8)꺼지지 않는 열정의 불

1984년 국산 원전연료 첫 장전 ‘에너지 자립’ 꿈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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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원전으로 이어진 에너지 자립의 꿈

 5월을 사나흘 앞둔 하오의 봄 햇살이 비쳐드는 전원계획처의 회의실 내부는 더위를 느낄 만큼 따뜻했다. 유리창 밖으론 봄꽃과 신록들이 계절의 정취를 뽐냈지만 누구도 바깥 풍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만큼 회의는 진지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부에선 원자력 발전소 건설보다 보령 3·4호기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 그런 의견들이 돌고 있습니다.”

 심 구조과장의 말에 전재풍 처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그 소문은 듣고 있었다. 또 원인도 잘 알았다. 현재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에 이은 월성 1호기가 운영되고 있고, 후속으로 고리 2호기와 울진 1·2호기가 현재 건설 중이었다. 또 조만간 영광원자력 3·4 호기가 착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3년 전에 있었던 옛 소련의 체르노빌 사건은 아직 그 충격적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원자력발전소 1기를 더 짓기보다 유연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소인 보령 3·4호기 건설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은 심리적이나 정황적으로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전원개발계획을 입안함에 있어서는 보다 명확하고 종합적인 자료와 논리적인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 필요했다. 사실 오늘 대책회의는 그 점을 확실히 해두기 위한 것인 셈이었다.

 원래 회의의 주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발생할 심각한 전력부족 현상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이미 몇 년 뒤에 있을 전력부족현상이 전력 예비량 그래프로 예고되고 있었다. 놀랄 만큼 빠른 고도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전력 사용량의 급증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전력 비상사태인 ‘블랙아웃’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국가 전력에너지를 담당한 전원계획처로선 당연히 늘어나는 전력수요에 대비하여 신규전원을 개발해야 했다. 결국 회의의 최종 논의는 과연 어떤 형태의 발전소를 짓는 게 경제성이나 미래정책상 더 합리적일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졌다.

 “하지만 제 의견은 월성 2호기를 건설하는 게 여러모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자력기획과의 민 과장이 힘주어 말했다. 그는 전원계획처의 다른 여느 직원보다 더 원자력발전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민 과장을 바라보던 전 처장은 문득 몇 년 전까지 한전에 재직했던 김영준 사장을 떠올렸다. 그 역시 누구보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던 사람이었다.

 6대 한전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고리원자력 현장으로 달려가는 열정을 보여주었던 그는 자주 주변사람들에게 연료자원이 없는 한국은 전력의 반 정도를 원자력이 담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고리 3·4호기를 한전 주도형으로 바꾼 것도 그의 강한 소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는 대만의 원전사업을 둘러본 뒤 귀국하여 대만이 처음부터 넌(non)-턴키방식으로 원전을 건설한 사실을 주지시켰다. 한국의 턴키방식 경수로 원자력건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한국의 원자력 건설이 넌-턴키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도 사실 그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김영준 전 사장으로 인해 아직 월성 2호기가 시공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전 처장은 생각했다. 원래 월성 1호기 건설계약 당시 월성 2호기는 옵션으로 묶여 있어서 어느 때라도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건 울진 1·2호기가 그랬고, 영광 3·4호기가 그렇듯 2호기를 동시에 건설하도록 예정돼 있던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캐나다원자력공사는 월성 1호기 건설 때부터 2호기 건설을 거듭해서 요청해왔던 것이다.

 1982년에 내한하여 준공을 앞둔 월성 1호기 건설현장을 방문한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 역시 그랬다. 당시 그는 월성의 캐나다 기술자들 사택 앞에 마련된 야외무대에 올라서서 말했다. ‘나는 캐다나 밖에 있는 자국 최대의 콜로니(식민지라는 의미보다 자국민의 해외집단거주지를 뜻함)에 왔으며, 여러분의 노력이 모여 이처럼 훌륭한 원전을 건설한 것이다’라며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뒤이어 그는 월성 2호기 건설을 몇 차례나 강하게 한전 측에 요청했다. 그건 당시 전 처장이 월성 1호기 사업관리책임자로 있을 때였고, 현장 안내를 맡으면서 직접 겪은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김영준 한전 사장은 월성 1호기를 가동해보고 성능이 좋으면 그때 추진해도 괜찮다는 식의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마도 운전 실적이 없다시피 한 중수로에 대한 투자가 여러 모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을 터였다. 또 당시는 석유파동으로 인한 재원조달의 문제를 포함하여 중수로 원전 건설계획이 명확히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료를 비교, 검토해보셨다시피 석탄 화력발전에 비해 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어 있습니다. 또 그간 월성 1호기를 지켜본 결과 연간 운영실적도 예상보다 탁월하고요. 게다가 월성원전은 1호기 건설 때부터 2호기 예비공사를 마친 것은 물론 공용설비 부분에 이미 1천억원가량의 투자가 진행돼 있어 1호기 복제설계 개념으로 건설할 경우 값싸게 추진할 수 있습니다.”

 민 과장의 말에 전 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김영준 사장이 운영을 걱정하던 월성 1호기는 85년 4월부터 86년 3월까지 1년 이용률 98.4%를 달성하여 전 세계원전 중 최고 기록을 세우는 등의 뛰어난 운영실적을 보인 바 있었다.

 “또 원전연료 제조기술의 국산화가 이미 100% 완성된 상태여서 국가 에너지 자립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월성 1호기 이용률 세계 최고

경제성도 이미 충분히 입증”

월성 2호기 건설 불씨 살려내

韓 기업 종합설계·설비 참여

원전기술 자립 기반도 마련

2 

◆원자력 기술자립의 기반을 마련하다

 중수로 원전연료 국산화사업은 1981년에 정부출연금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 과학기술처에 특정연구제도가 신설되면서 특정연구과제로 선정되었다. 원전연료설계를 비롯하여 노심관리 및 안전해석, 우라늄 분말제조, 노내 및 노외시험 평가, 품질보증과 검사기술 등 일련의 기술 개발·추진이 그것이었다.

 여기에 82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캐나다원자력공사와 ‘원전연료 검증시험사업’ 계약서에 서명하여 중수로 원전연료의 핵심기술 확보차원에서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 노외실증시험을 자력으로 설계·건조해 원전연료의 노외시험도 가능해졌다. 이것은 원전연료 검증사업이 본궤도에 들어섰음을 의미했다.

 그 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보낸 천연우라늄 원전연료집합체가 캐나다원자력공사의 엄밀한 검사를 거쳐서 초크리버 원자력연구소의 NRU원자로에 장전되었다. 이후 약 7개월간의 연소시험을 거친 결과 천연우라늄 원전연료가 124MWh/kgU 연소됨으로써 건전성을 입증받은 것은 물론 국제적 공인까지 얻게 되었다. 곧이어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과학기술처로부터 자체 제작한 원전연료에 대한 설계승인을 받았다. 83년에는 연10t 규모의 시험시설을 설치·완료해서 그해 10월에 시운전에 들어갔다. 당시 생산에 성공한 소결성 UO2 분말은 월성 1호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상용이 가능한 완전한 제품이었다.

 드디어 84년 9월에 최초의 국산시제품 원전연료 24다발이 월성 1호기에 장전되었다. 그건 중수로 원전연료 성형가공 국산화와 함께 월성 1호기의 원전연료를 모두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월성 1호기만 해도 원전연료를 국내에서 전량 공급할 경우 연간 약 400만달러의 외화를 절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월성 2호기 건설이 경제성, 안전성, 신뢰성 부분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됩니다.”

 “예전처럼 캐나다 측에서 턴키방식을 고집한다면 좀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듣고 있던 직원 한 명이 민 과장의 말을 받았다.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번에는 넌-턴키방식으로 건설계약을 해야 할 것입니다. 차제에 원자력기술을 우리 것으로 하지 못한다면 그건 76년에 정부가 추진한 ‘도입 기계설비 국산화 추진요강’에도 어긋나는 셈이 되니까요.”

 민 과장의 말이 끝나자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 대다수가 민 과장의 의견에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더 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해 보였다. 좌중을 둘러보던 전 처장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일단 잠정적으로 월성 2호기 건설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캐나다원자력공사로부터 가견적을 받아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건설기본계획 보고서는 그 후에 확정·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전은 89년 5월2일에 월성 2호기 건설기본계획을 확정지었다. 그해 12월에는 제214차 원자력위원회가 의결한 ‘월성 2호기 건설계획’에 따른 설계 및 주기기 공급에 대한 공급제의요청서가 캐나다원자력공사로 발급되었다.

 마침내 90년 12월에 체결된 주기기 공급계약에서는 플랜트 종합설계 및 원자로설비 주계약자로 캐나다원자력공사가 선정되었다. 또 한국전력기술과 한국중공업이 플랜트 종합설계 및 원자로설비 공급분야 하도급계약자로 참여, 중수로 원전에 대한 기술전수를 꾀했다. 터빈발전기 공급분야는 한국중공업이 주계약자로 계약, 체결되었다. 원자력 기술자립의 기반이 마련된 셈이었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한국전력기술 30년 : since 1975년’ ‘한국전력공사 발간 살아있는 전력사-누리를 밝혀 온 한세기’, 차종희 저 ‘영광과 탁마의 세월 : 원자력과 함께 30년’, 한국원자력산업연구원 발간 ‘한국원자력산업연감’, 박익수 저 ‘한국원자력창업비사’

■사진설명

<본문사진1> 월성원자력본부 내에 세워진 원전 이용률 세계 1위 기념탑. 월성 1호기는 1985년 4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1년 이용률 98.4%를 달성, 당시 세계원전 중 최고의 운영실적을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월성 1호기에서 얻은 중수로 운영노하우는 향후 월성 2호기의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월성원자력본부 제공>

<본문사진2> 1984년 9월8일, 국산핵연료의 월성 1호기 최초장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다. 월성 1호기의 국산핵연료 장전은 중수로 원전연료 성형가공의 국산화가 이뤄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출처 : 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본문사진3> 1984년 8월29일 열린 월성 1호기용 국산핵연료 최초 출하기념식. 핵연료 국산화는 외화유출을 막는 것은 물론 국가에너지 자립에도 큰 도움이 됐다.

<사진 출처 : 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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