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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영남일보 기획연재ㅣ한국 에너지의 심장, 월성원전 제7화

  • 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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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너지심장 월성원전

(7)월성, 불을 밝히다

 

수많은 역경 극복하고… 1983년 4월22일 마침내 첫 중수로원전 ‘힘찬 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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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단축을 위한 통신망 구축

 사무실에 들어서자 외국인 직원이 손으로 복도 안쪽의 회의실을 가리켰다. 모던하게 장식된 회의실에는 캐나다인 현장 책임자 혼자 골똘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서 소장을 발견한 현장 책임자의 푸른 눈동자에 반가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5월에 있었던, 고의로 공사를 지연시킨 일에 도의적 책임을 진 영국계 캐나다인 현장 책임자가 떠난 뒤 새로 부임해온 사십 대 중반의 현장 책임자였다. 몇 번 만나본 결과 매사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성품을 가진 인물인 듯 보였다.

 “의논할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악수를 나눈 뒤 서 소장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물론입니다. 바쁘신 줄 알지만 도움을 주십사 하고 청했습니다.” 캐나다인 현장 책임자의 얘기를 들으며 서 소장은 회의실 중앙에 자리한, 정교하게 제작된 모형 원자로 기기에 눈길을 주었다. 실물 크기의 25분의 1 축척으로 제작된 모형에 불과했지만 원자로 건물 내의 기기와 배관 설치공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끔 입체적으로 설계된 것이었다. 국내에선 처음 건설되는 중수로방식의 월성 1호기 건설과정에서 일어나는 잦은 설계변경을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측이 도입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두면 원자로 기기의 3차원 배치와 기기설치를 위한 작업절차서 작성, 그리고 배관과 전산지지반 등의 도면제작 모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유용하게 변경, 제작할 수 있었다. 본받을 만한 방식이었다.

 “서 소장님이 누구보다 공기단축을 위해 노력하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선 더 이상 공기를 단축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서 소장님의 고견을 듣고자 이처럼 청한 것입니다.”

 “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서 소장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캐나다 현장 책임자는 곧 솔직하게 문제점을 털어놓았다. 책임자가 밝힌 것은 그들 캐나다 원자력공사가 사용하는 DICON(Device Installation & Connection) 시스템에 관한 내용이었다.

 DICON 시스템은 캐나다 제너럴 일렉트릭(GE)사에서 대형 프로젝트에서의 결선도 및 배선도 등의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 자체개발한 데이터 전산처리 기술이었다. 따라서 월성원전 1호기 건설 초기에는 DICON 정보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항공수송을 이용하여 설계부서와 시공부서 간에 정보를 교환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정보생산에서 현장 도착까지 6~7주라는 적지 않은 기일이 소요됐다. 건설 초기에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지만 건설공정이 중후반기로 넘어간 지금, 현장작업에서 설계변경이 빈번해지면서 공기단축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더욱이 월성원전 1호기는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60만㎾급 CANDU 표준설계에 의해 건설되고 있는 젠트리 2호를 기준발전소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운전 실적이 없는 원형로였다. 따라서 수십 기의 동일 모형과 동일 용량으로 건설, 운전되고 있는 가압경수로(PWR)에 비해 많은 설계변경이 뒤따랐다. 게다가 1979년에 일어난 미국의 스리마일(Three Miles lsland)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영향이 빚어낸 안전강화조치에 따라 약 1천50건의 설계개선 및 설계변경이 뒤따랐다. 더불어 기계 관련 변경도 400여 건에 가까웠다. 특히 현장 재작업에 소용되는 설계변경은 공기목표를 달성하는 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터에 DICON 시스템이 지닌 시간적 결함까지 더해지면서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공기 안에 완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해결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서 소장은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를 지인들을 찾아내 전화 걸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다각도로 방안을 물색하길 며칠,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처럼 마침내 해결방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알기는 어려워도 알고 나면 쉬운 문제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81년 1월에 월성원전 현장에는 전폐기 단말기가 설치되었고, 현장과 서울~금산위성통신지구국~미국위성통신지구국~미국 GE사의 클리블랜드(Cleveland) 소재 중앙처리장치(CPU)를 연결하는 통신위성중계소 통신망이 구성되어 활용되기 시작했다. 지금 보기에는 단순한 이 통신망이 당시에는 현장의 작업 속도를 크게 향상시킨 것은 물론이고 건설 후기에 발생하는 설계변경 사항을 즉시 현장에 반영하는 데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던 것이다. 공기 단축을 위한 노력이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을 창안해낸 셈이었다.

건설허가 62개월 만에 상업운전

광복때 20만㎾ 불과하던 발전용량

월성1호기로 단숨에 1000만㎾ 돌파

공사비 6428억원·연인원 410만명

시멘트 340만포 등 투입 ‘大役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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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전설비용량 1천만㎾ 시대 개막

 공기단축을 위한 이러한 여러 노력이 더해지면서 공사는 점차 속도가 붙었고, 월성 1호기는 서서히 웅장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81년 3월18일에는 발전기 고정자 설치공사에 착수했고, 뒤이어 옥외변전설비 154㎸의 가압이 실시되었다. 다음 해인 82년에는 원자로 냉각재계통 시운전에 들어가 5월5일에는 냉각수계통 수압시험을 완료했다.

 같은 해 8월14일에는 성낙정 한전 사장과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 로우손 캐나다 원자력공사 수석 부사장 등 국내외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라늄 원전연료를 첫 장전했다. 한전 직원들을 비롯한 건설관계자들은 깊은 감회를 안고 이 기념비적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이후로 11월21일 오전 9시21분에 점화상태로 진입시킴으로써 처음으로 원전연료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최초임계에 도달했다. 또 12월31일 오전 7시에는 계통병입에 들어감으로써 원자로 최초임계 도달 이후 계속되는 시운전 작업을 무사히 완료했다. 83년 3월30일에는 성능보증시험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았다. 4월 초순에 있었던 발전기 성능시험 결과 전기출력이 계약보증출력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원인을 찾아본 결과 증기 내의 수분 함유량이 설계치인 0.25%를 초과해서 무려 12.5%나 되었다. 이를 해결하려고 캐나다 원자력공사에서 재설계를 하는 등 철저한 개선작업을 거쳐야 했다. 먼저 증기발생기의 습분 분리기 성능개선이 있었다. 또 준공식 이후인 84년에는 2단계로 건조기를 교체했다. 그제야 습분 함유량이 0.17%로 향상되어 설계치를 만족시켰고, 전기출력을 계약보증출력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많은 우여곡절과 각고의 노력 끝에 부지선정 등으로 1년 넘게 늦어졌던 공기는 대폭 단축되었고, 건설허가시점 기준으로 62개월 만인 83년 4월22일, 마침내 한국 최초의 중수로형 원전인 월성원전 1호기의 상업운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준공식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고리 1호기에 이은 두 번째 원전(당시 대다수 신문지상엔 원자력 3호기 준공식으로 발표되었음) 준공식으로 내자 3천55억원과 외자 5억9천500만달러 등 모두 6천428억원의 공사비와 연인원 410만명이 동원되었다. 턴키방식의 공사로 캐나다원자력공사가 원자로 및 연료, 증기발생기 계통을, 터빈발전기 계통은 파슨스 영국·캐나다 합작사가, 변전설비는 영국의 GE사가 맡았다. 여기에 한국전력이 설계·감리를 맡았으며 시공 1차 계통은 현대건설이 맡았고 2차 계통은 동아건설, 비파괴검사는 삼영비파괴가 맡았다. 또 시멘트 340만 포대, 철근 2만3천t, 철골 9천t, 케이블 1천500㎞, 배관 1만500개가 투입되었으며 안전성 유지를 위한 계측기기만도 3만5천여 개가 설치된, 가히 역사적인 대공사였다.

 이날, 월성 1호기 준공으로 한국의 발전설비는 1천30만4천㎾로 늘어났다. 45년 광복 당시 19만9천㎾(남북한 총설비 172만3천㎾의 11.5%)의 소규모로 출발했던 우리나라가 드디어 설비용량 1천만㎾ 돌파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준공식이 있은 날은 새벽까지 내린 비로 땅이 몹시 질척했다. 현장인부들이 임시방편으로 땅바닥에 마대자루를 덮었다. 정부요인과 내외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경호원과 경찰들이 아침부터 바쁘게 현장을 돌아다녔다.

 정오가 가까웠을 무렵 굉음을 내며 헬기가 창공을 날아왔다. 이날 월성군 양남면 나아리 현지에서 있었던 준공식에 참석한 정부관계자들은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김준성 부총리와 서상철 동자부장관, 이정오 과기처장관, 배명국 국회상공위원장과 크레티엔 캐나다에너지성장관 등이었다. 이날 참석한 이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 준공식에 거는 전 국민의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날 준공식에서 1천만㎾ 돌파기념 및 원전 준공과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훈굛포장을 수상한 사람은 20여명으로 대강 다음과 같다. 성낙정 한국중공업 사장이 금탑산업훈장을, 원자력건설부 이종훈 부장이 은탑산업훈장, 서석천 월성원자력 건설소장 등이 동탑산업훈장을, 전재풍 원자력건설부 차장과 박용택 월성건설과장, 오용식 월성원자력 건설부소장 등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공사관계자와 주민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월성원전의 준공과 현장 직원들의 노고를 뜨거운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돌아보면 정녕 뜻깊은 날이었다.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영호남의 빛과 에너지로 이용될 원자로의 터빈이 미래를 위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글=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한국전력기술 30년 : since 1975년’ ‘한국전력공사 발간 살아있는 전력사-누리를 밝혀 온 한세기’, 차종희 저 ‘영광과 탁마의 세월 : 원자력과 함께 30년’, 한국원자력산업연구원 발간 ‘한국원자력산업연감’, 박익수 저 ‘한국원자력창업비사’

■사진설명

 <본문사진1> 월성 1호기의 준공으로 한국의 발전설비는 1천30만4천㎾로 늘어났다. 경주 양남면 월성원자력본부 내에 월성 1·2·3·4호기(왼쪽부터)가 줄지어 서 있다. <월성원자력본부 제공>

<본문사진2> 1982년 8월14일, 성낙정 한전 사장과 로우손 캐나다 원자력공사 수석 부사장이 월성 1호기의 최초 원전연료 장전 시범을 보이고 있다.

<본문사진3> 1983년 4월22일, 월성군(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서 한국 최초의 중수로형 원전인 월성원전 1호기의 준공식이 열리고 있다. 월성 1호기 건설은 총 6천428억원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본문사진4> 월성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원전 준공 공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대통령으로부터 훈·포장을 수상한 원전건설 관계자는 20명에 달했다.

<사진 출처 : 한국수력원자력<주> 발행 ‘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원자력 발전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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