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양자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한국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 2014.02.25.
  • 4909
  • 블로그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1

한국의 핵물리학자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휘소 박사입니다.

1977년 뜻밖의 교통사고로 42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휘소 박사는 양자역학에 ‘힉스보손’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재규격화 양-밀스 이론’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1999년 노벨상 위원회는 “물리학에서 전자기-약작용에 관한 양자구조를 밝힌” 공로로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엇호프트와 펠트만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시상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휘소 박사가 살아있었다면 이들의 연구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그가 공동수상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휘소 박사가 수상을 못한 것은 노벨과학상은 최다 3명까지, 2개 분야 이내로 시상할 수 있으며,
또 죽은 사람은 수상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천재물리학자 1호 이휘소 박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이휘소 박사는 1935년 의사 어머니와 교사 아버지 사이에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박사는, 경기 중학교를 다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마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된 그는 1952년 검정고시를 치러 서울공대 화공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합니다.
공대 수업을 듣다가 물리학에 흥미를 느낀 이 박사는 물리학과로 전과를 하려했으나 학교 규정상 전과를 할 수 없자 미국 유학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1955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으로 장학생이 되어 미국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대학의 물리학과에 편입한 그는 천재성을 십분 발휘해 유학 1년 만에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그의 진로는 탄탄대로였습니다.
1958년 피츠버그 대학에서 석사를, 1960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한국인 최초로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펜실베니아 대학과 뉴욕 주립대 교수를 거쳐 1973년에는 페르미 국립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해 소립자 물리학분야에 많은 양의 논문들 발표했습니다. 학자로서 절정을 구가하며 이휘소 박사의 연구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1977년 6월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

학자로서 이휘소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1950년대 후반 페르미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지면서 소립자 물리학계에는 큰 변혁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 등을 통일장 원리에서 추구하는 이론들은 많았지만 정작 게이지장의 재규격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박사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실린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의 논문을 심사하다가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졌다’는 와인버그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 대칭성이 부서지는 현상과 재규격화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썼고, 그것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

그의 이론은 1970년 그의 강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 Hooft)가 그의 지도교수 마르티뉘스 펠트만(Martinus Justinus Godefridus Veltman)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1972년 이들은 자신들이 체계화 한 재규격화 양-밀스 이론을 발표했지만 다른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때 이휘소 박사가 ‘힉스 보손’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재규격화한 양-밀스 이론’을 명쾌하게 설명해 물리학자들이 그 이론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줬습니다.

 

1

힉스보손이란 입자가 질량을 갖도록 하는 가상의 입자입니다.
이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와 물질을 구성하지 않지만 에너지를 전달하는 힘 매개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를 설명해주는 소립자입니다. 힉스보손은 오늘날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제시하는 기본 입자 중 하나입니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한 것은 엇호프트와 펠트만이지만, 그 이론을 이해하게끔 완성한 것은 이휘소 박사라고 인정합니다.
만일 이휘소 박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재규격화 양-밀스 이론은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 역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죠.

이렇듯 이휘소 박사는 소립자와 양자역학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학자로서 세계적 명성을 쌓아가던 그의 삶은 뜻밖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경 페르미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콜로라도 주 아스펜으로 향하던 박사의 차가 맞은편 고속도로에서 넘어온 대형 트럭과 충돌했습니다.

 

1

이 사고로 이휘소 박사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가족들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당시 기록에 의하면 바퀴에 펑크가 난 36톤급 대형트럭이 방향을 꺾어 이휘소 박사의 차까지 달려와 충돌한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 이휘소 박사의 교통사고는 몇 가지 의문점을 남겼습니다.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는데, 이휘소 박사가 여기에 관여를 했고, 이를 막기 위해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해 이휘소 박사를 암살했다는 음모설이 그것입니다. 1989년에는 이런 음모설을 바탕으로 한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소설책이 출간되었고, 1993년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장편소설로, 1995년에는 동일한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트럭의 바퀴 펑크로 인한 통제불능이 원인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KBS의 취재팀이 다큐멘터리로 보도해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이휘소 박사 암살설은 지금도 그의 죽음이 너무 허망하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휘소 박사의 암살설과 핵무기 개발 관련설은 그의 연구분야와도 맞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은 단지 작가의 상상으로 빚어낸 하나의 허구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휘소 박사는 늘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고 끊임없이 연구하며 최선을 다한 세계적 석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학업에 매진하면서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우리 청소년들도 꾸준히 노력해 이휘소 박사의 뒤를 잇는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되어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과학세계를 우리에게 펼쳐보였으면 합니다.

 

0

코멘트(2)

  • 물리학자 2 년 전에

    프린스턴이 아니라 피츠버그에서 석사했어요..^^

    • 운영자

      운영자 2 년 전에

      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댓글 남기기

블로그지기
블로그지기
한수원의 생생한 소식과 한수원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