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블로그
삶에 활력(力)을 더하는 이야기
모바일메뉴 열기
검색창 닫기

세계 최초 원자로 건설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는 누구?

  • 2014.03.12.
  • 2904
  • 블로그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 인쇄

1

26세에 물리학과 교수 취임, 39세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 그리고 세계 최초 원자로 건설!
엄청난 이력을 자랑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입니다!

엔리코 페르미는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실험과 이론, 양쪽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1938년에는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들기도 했는데요, 원자 번호 100번 원소는 그의 업적을 기려 ‘페르뮴’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원자력 계에 큰 획을 그은 중성자의 마술사! 엔리코 페르미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3.

엔리코 페르미는 1901년 9월 29일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철도 감독관 아버지와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였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을 무척이나 좋아해 ‘수학 천재’로 불렸다고 합니다. (10살 때 혼자 원의 방정식을 만들 정도였대요!)

이런 관심사는 쭉 이어졌고 1918년 페르미는 피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배웁니다.
그는 여기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해 교사들의 가르침을 추월했다고 해요. 정말 대단하죠?

페르미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이탈리아 정부의 특별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와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덕분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고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었죠. 그 결과 페르미는 1926년 26세의 나이에 로마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연구 중 하나인 ‘페르미 통계’ 역시 이 시기에 나왔는데요, 이것으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페르미 통계는 전자의 행동에 파울리 배타 원리를 도입한 새로운 통계역학이었습니다.

 

1

금속의 열전도나, 백색 왜성의 안정성에 관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죠.
비슷한 시기에 폴 디랙도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 ‘페르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 로도 불립니다.
페르미의 여러 연구 중 특히 눈여겨 볼 부분에 ‘중성자 연구‘가 있습니다.

1932년에 영국의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곧 중성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죠.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 40 종류 이상의 인공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성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학계에서도 인정을받아 1938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

하지만 그는 노벨상 수상 후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세는 히틀러와 손잡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세력의 득세로 날로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은 갈수록 극심해졌죠. 이것은 페르미의 가족에게도 큰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인 로라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죠. 이탈리아에 남아있게 된다면 여러 압력과 제재를 받을 것을 예상했던 페르미 가족은 미국 망명을 결정했습니다.

1939년 미국으로 이주 후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그 곳에서 핵분열 반응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핵분열 시에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함께 튀어나와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증도 이 시기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페르미는 1942년에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 1호’를 완성시켜 원자핵 분열의 연쇄 반응 제어에 성공했습니다. 이 원자로는 원자 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었는데요. 그는 이를 계기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계획에서 중심 역할을 맡습니다.

 

4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우주선 관련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우주선 가속(페르미 가속) 현상에 대해 이론적으로 밝혔으며, 비선형진동자에 관한 ‘계산기 실험’도 하여 ‘페르미의 재귀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는 오늘날 솔리톤(soliton) 연구의 첫걸음으로서 계산기 실험의 최초의 예가 됩니다. 이론과 실험 양면에 걸친 연구를 계속하던 페르미는 1954년, 53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링거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격을 측정해 유속을 산출하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페르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 후학 양성에도 힘을 썼는데요, 제자 중 무려 6명이나 노벨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연구에서나 교육에서나 정말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하죠? ^^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원자력의 기틀을 마련한 엔리코 페르미, 핵물리학계에서는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굵직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0

댓글 남기기

블로그지기
블로그지기
한수원의 생생한 소식과 한수원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