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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사 탐험] 경복궁의 전기점등

  • 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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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1

경복궁의 전기점등

여명의 시작, ‘건달불’ 애환 갖기도

현대 산업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에너지전기. 이 땅에서 ‘문명의 빛’, 전기가 처음 등(燈)을 밝혔던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최초의 민족기업인 한성전기회사 설립(1898년 1월 26일)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 1887년 3월 6일 구중궁궐 건청궁 뜰에서였다.

외세와 개화의 물결 속에 파란만장했던 풍운의 구한말. 어지러웠던 난세 속에서 경복궁의 깊숙한 내전인 건청궁(乾淸宮)에 전기불이 켜졌다. 난생처음 찬란한 세상을 본 조백관들의 눈과 입은 쩍 벌어졌다. 지금으로부터 꼭 127년 전인 1887년 3월 6일의 일이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 여명기의 큰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사회에서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갖가지 희비극이 벌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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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초의 발전기. 경복궁에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밝힐 수 있었던 이 발전기는에디슨전등회사로부터 도입했다.]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들, 경복궁 발전설비 발주

1882년 5월 조·미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정부는 수교에 대한 보답으로 다음해 9월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다. 보빙사의 미국 파견은 두 나라 과학기술교류의 발단이 됨과 동시에 이 땅에 전기 문명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는 동안 당시 시험 보급단계에 있던 미국의 전등설비를 직접 견문하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조선에서도 이러한 전기가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푸트(Lucius H. Foote) 초대 주한미국공사 역시 조선 정부에 전등 사업을 적극 권유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4년 1월, 미국인 프레이자(E. Frazar/厚禮節)가 뉴욕 주재 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자 보빙사 일행은 이 프레이자를 통해 같은 해 9월, 에디슨전등회사에 경복궁 발전시설을 발주했다. 에디슨 전등회사는 미국의 유명한 발명왕인 토마스 에디슨이 경영하는 전기회사였다(*참고로, 원자력은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임을 강조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도 원자력발전을 해보라”고 권유했던 워커 시슬러도 이 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이 발전설비는 배편으로 일본을 거쳐 인천에 도착했고, 1887년 1월말 경복궁에 도착, 시공에 들어갔다. 설치는 경복궁 향원정 연못가 남쪽, 지금의 교량 부근이었다. 이곳에 설치하게 된 이유는 첫째, 향원정 연못과 인접해 발전용수의 취수가 용이하고, 두 번째는, 주변의 공간이 넓어서 시설물 설치에 용이하며, 세 번째는, 궁궐 내중심부 근처여서 각 전각에 대한 근거리 배전이 유리하다는 여건들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경복궁의 주요 전각에서는 5지(枝) 또는 6지(枝) 등촉대에 밀촉을 사용했고 그 밖의 부속건물에서는 우지(牛脂)로 만든 촛불을 사용하는 것이 통이었다.

에디슨전등회사를 통해 도입한 발전설비는 보일러, 엔진, 발전기, 배전반 등으로 구성되어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고, 발전연료는 석탄을 사용했다. 발전기와 함께 건청궁의 대청마루와 뜰에 100촉광의 서치라이트가 한 개씩 각각 시설되고, 마침내 춘풍이 불어오는 3월 초 어둠이 내리는 시각에 점등행사가 거행됐다. 그 찬란한 불빛 앞에서 궁 안의 모든 벼슬아치와 궁녀들은 깜짝 놀랄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도깨비 불’이 켜진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건청궁 밖의 다른 궁 사람들까지 온갖 구실을 달아서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누구도 그것이 전등이라고 하지 않았고 그저 ‘불가사의’한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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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지금의 향원정. 경복궁의 발전설비는 이 연못의 물을 냉각수로 사용했다. 사진에서 왼쪽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공학박사이다.]

 

전기기사 맥케이의 사망과 ‘건달불’ 애환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 경사스런 사건 이면에는 달갑잖은 일들도 생겼다. 에디슨전등회사 소속 전기 기사 윌리엄 맥케이가 자신의 총을 조수가 만지다가 우발적인 오발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행한 것. 건청궁의 안(安) 상궁이 쓴 <회고담>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매일 저녁이면 언제나 서양인이 와서 기계를 운전했으며, 그는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인 조수가 그 권총을 잘못 만지다가 오발되어 그 서양인이 맞고 다음날 사망했는데, 그 후 불길한 것을 사용할 수 없다하여 지…(생략)”라고 하였고, “언제부턴가 이 불가사의한 것은 ‘건달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87년 3월 8일 맥케이가 죽기 전 이미 전등은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과 이후 건달불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붙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발전기의 냉각용수가 열탕이 되어 향원정 연못으로 역류하게 되면서 고기가 떼죽음을 당하자 일부 사람들은 ‘증어(蒸魚)는 망국의 징조’라고 쑤군대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배의자객이 난입,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가 시해되었고, 일인들은 죄지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건청궁을 헐어버린 뒤 그 자리에 미술관을 세워(현 민속박물관 자리)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문화의 새 빛을 던진 전등으로선 최초의 일이었다. 이 문명의 불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마침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 서울 장안의 전차와 전등, 전화사업으로 번지게 됐다.

※ 한국수력원자력 사보 '수차와원자로' 발췌

송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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