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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편견에도 활짝 핀 ‘과학의 꽃’ 리제 마이트너

  • 20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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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계적인 과학전문잡지 네이처는 세계 6대 과학 성과를 선정해 발표하며 그 중 하나로 ‘핵분열’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의 편집장 필립 캠벨은 그중에서도 리제 마이트너의 핵분열 연구를 지목했습니다. 리제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로서, 방사선과 핵물리학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여류 물리학자, 그래서 학문적 연구 외에도 많은 수많은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했던 리제 마이트너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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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듯 학창 시절에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마이트너는 특히 과학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죠.

오스트리아의 초기 유대인 법률가였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존중해 계속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여성 교육에 보수적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상급 학교 진학 때 마이트너는 남녀 차별 때문에 지금의 검정고시와 같은 고교 졸업 자격시험을 별도로 치러야 했습니다.

1901년 빈 대학교에 입학한 마이트너는 여대생이 흔치 않은 대학교에서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마이트너가 학문에 더 몰두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강의에 푹 빠져 전공을 물리학으로 선택했습니다. 퀴리 부부가 라듐을 발견한 1902년에는 그것에 자극 받아 당시로서는 첨단 분야였던 핵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마이트너는 최우등으로 졸업시험을 통과했으며, 비균질 물질의 열전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빈 대학교에서는 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두 번째 여학생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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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리제 마이트너는 졸업한 뒤에도 박사후 과정을 밟기 위해 1~2년의 계획으로 베를린 대학교에 갔습니다. 그 대학의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주로 방사능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죠.

여기에서 그녀는 베를린 대학교의 화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던 유능한 방사화학자 오토 한(Otto Hahn)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성격도, 나이도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과학자가 흔치 않기는 베를린 대학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마이트너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여러 불편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일례로 화학과 학과장인 에밀 피셔(Emil Fischer)는 학교 관례에 따라 여성의 연구소 출입을 금지해 마이트너는 정문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사용하는 지하 뒷문으로 출입해야 했습니다. 또한 여자 화장실이 없어 길 건너편의 식당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복도 근처에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연구소 출입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이런 관례는 베를린 대학교가 여성 입학을 허용한 19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풀렸다고 합니다.

그후 마이트너가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놓자 연구소장은 비로소 여성화장실을 설치하고 연구소 출입도 허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리제 마이트너는 늘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이에 연연하지 않고 연구에 온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토 한의 연구원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능력이 비슷한 남자 동료들이 모두 정교수가 되었지만 마이트너는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교수 임용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1926년 뒤늦게 정교수도 아닌 ‘별정직’ 여성 교수가 됐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마저도 1933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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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 분위기와 편견 속에서도 그녀의 연구 열정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으로부터 ‘우리들의 마담 퀴리’로 불렸던 마이트너는 1918년 91번 원소인 프로탁티늄을 발견했고, 1924년 원자선이 방출될 때 베타선이 감마선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했습니다.

1924~1925년에는 프로탁티늄에 관한 연구로 오토 한과 함께 노벨화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1935년 초 나치의 집권으로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마이트너는 핵분열로 나아갈 수 있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1938년 그녀는 나치의 눈을 피해 스웨덴 노벨연구소로 피신했고, 그곳에서도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 등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 성과를 냅니다.

우라늄 235(원자번호 92)의 원자핵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두 개의 다른 원자핵으로 분열하고, 이때 원자핵은 전혀 다른 물질로 변화하면서 큰 에너지를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1945년 오토 한은 우라늄 핵분열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공동 수상자가 되었어야 했던 마이트너는 수상자에서 제외되고 말입니다. 여성이자 유대인인데다 보조연구원이라는 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죠.

당시 마이트너는 “오토 한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난 그의 보조 연구원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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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트너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라, 하지만 생각은 스스로 하라.”

그래서인지 그녀는 당시 일반 여성들처럼 유순했지만 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속출하는 부상병들을 돌보기에 위해 그녀는 간호사로 자원해 봉사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나치정권의 악행에 반대하지 않았던 독일 과학자를 비롯한 국민들에게 분노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원자폭탄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불명예를 얻었지만 결코 자신의 연구가 전쟁 도구로 쓰이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은 늘 변함없었습니다.

그녀의 신념은 “과학의 유용성이라는 개념이 너무 강조되는 것이 근본적인 자연법칙의 이해에 대한 즐거움을 점점 오염시킨다”는 발언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로서 그녀의 공로는 1960년대가 되어서야 인정받습니다. 그녀는 1962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도로테아 슐뢰처(독일 최초의 여성박사) 메달을, 1966년 미국 원자에너지청에서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습니다.

그 후 1968년 90세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그녀는 1992년 독일 다름슈타트 중이온연구소에서 증명된 109번째 원소 ‘마이트너륨’에 자신의 이름을 남깁니다.

늘 부당한 대우와 사회적 편견에도 소신을 버리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나간 그녀의 과학적 업적이 늦게나마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기쁨이자 자극이며 즐거움이라고 말한 그녀는 결혼을 할 시간도 없다고 할 정도로 물리학을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신념을 엿보면서 과학은 사람과 세상을 위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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