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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의 역사] 생각보다 오래됐고 사연도 많아요

  •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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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흔히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보다 효율적이고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첨단 문명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도 이런 도구를 만들어 활용하는 인간의 능력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발명한 수많은 도구 가운데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중요한 동력장치 역할을 해온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바람의 힘을 이용한 ‘풍차’와 물의 힘을 이용한 ‘수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수차를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우리나라의 수차 역사는 생각보다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자, 그럼 수차의 역사를 살펴보러 함께 떠나볼까요? 렛츠 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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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는 쉽게 말해 물의 빠른 유속, 또는 물의 낙하 하는 힘을 이용해 동력을 얻는 장치입니다. 수차는 용도에 따라 곡식을 찧는 제분용과 관개 및 수리용으로 구분되는데, 그 쓰임새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불렀습니다.

즉, 곡식을 가는 맷돌로 쓰일 때에는 수연(水碾), 수애(水磑), 수마(水磨), 수롱(水礱) 등으로 불렀고, 곡식을 빻는 방아로 쓰일 때는 수대(水碓) 또는 기대(機碓)라고 불렀습니다. 수차가 작동하는 원리는 물이 낙하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모든 물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이를 위치에너지라고 합니다. 수차는 바로 이런 물이 낙하하는 힘인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동력을 얻는 회전형 원동기인 것입니다.

한수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수력발전소에서 막대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수력 터빈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수차의 원리를 이용해 가동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수차와 한수원과의 관계가 무척 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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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력발전소에서 쓰이는 수차는 물의 낙차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가 사용됩니다. 물의 낙차가 크지 않은 우리나라의 수력발전소에서는 대부분 ‘프랜시스 수차’가 쓰이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수차는 낙차 50~530m의 댐에서 주로 사용되는데, 화천, 섬진강, 소양강, 충주 발전소의 수차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약 200~1800m의 낙차가 큰 곳에서는 ‘펠톤 수차’가 사용되는데, 강릉 발전소가 대표적이고, 청평, 춘천, 의암 발전소 등의 저낙차에서는 프로펠러 방식의 ‘카플란 수차’ 등이 사용됩니다. 또한 팔당수력발전소와 같이 흐르는 물의 양은 많으나 낙차가 적은 곳에는 원통형 수차가 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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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이 수차가 도입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수차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5, 6세기경부터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610년에 고구려의 중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그해에 연자 맷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수차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단 한번 나타납니다. 1362년(공민왕 11년) 기록에 따르면 농민들이 저수지와 제방을 쌓아 물을 끌어대는 것에만 의존하여 관청에서 수차를 만들어 보급하고 농민들에게 사용을 장려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기까지도 수차가 관개용으로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수차는 조선시대에 여러 번 사용을 장려하기도 했으나, 그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구조적인 발전이나 보급의 확대 없이 8·15 광복 전까지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용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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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씀드린 대로 조선왕조는 몇 차례에 걸쳐 수차의 보급을 시도했습니다. 세종대왕은 통치 말엽까지 여러 방법을 동원해 수차의 일종인 통차 사용을 여러 번 권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인 노력에 비해 보급된 숫자는 미미했고, 결과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 성종과 연산군 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용되던 손으로 돌리는 방식의 수차를 보급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1502년에는 전익경(全益慶)이 정교하고 능률적인 수차를 만들었다는 기록과 함께 명종실록에도 중국의 수차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밖에 숙종과 조선 후기 실학파도 수차 사용을 권장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이 모든 시도들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수차 보급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원인은 농민들의 가난으로 새로운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나라의 지세와 자연조건이 수차 사용에 불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고서저의 완만한 지형으로 하천의 유속이 완만합니다. 또 봄에는 가뭄이 자주 들어 수차를 돌릴만한 충분한 유량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수차 제작에 쓰일 적절한 목재가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점 중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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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수차는 우리나라에서는 효용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되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답차’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발로 밟아 돌리는 이 장치는 삼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수차로 염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올리는 데는 두레나 용두레 같은 장비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큰 두레박처럼 생긴 이 장비들은 두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쓸 수 있었습니다. 반면 답차는 구조가 간편하고, 제작비가 적게 들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밟아 돌려도 될 만큼 효율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답차는 삼남지방의 염전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지금도 서해 지방의 염전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수차의 역사. 생각보다 오래됐지만 그만큼 아쉬운 사연도 많이 녹아있죠. 과학적 사고가 뛰어났던 우리 선조들이 수차를 잘 활용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한수원이 관리하는 우리나라의 여러 수력발전소에서 오늘도 대형 수차인 터빈이 힘차게 돌아가며 우리에게 소중한 전기를 끊임없이 생산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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