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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사 탐험]경성전기(주)의 급신장 경인지역 전차, 버스, 전등사업 총괄

  • 201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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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전기(주)의 급신장

경인지역 전차, 버스, 전등사업 총괄

서울에서 조명과 난방, 취사를 겸할 수 있는 가스사업을 시작한 일한와사(주)는 마침내 한미전기회사를 매수한 뒤 사명을 경성 전기(주)로 변경했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속에서 서울 시내의 전차 와 버스, 전력사업을 총괄하면서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갔으며, 1961년 7월 1일, 당시의 조선전업, 남선전기 등 3사가 통합되어 현재의 한국전력(주)으로 설립되었다.

1※1928년의 경성전기 사옥. 현재는 한전이 을지로사옥(별관)으로 운영 중(등록문화재 제1호)

서울에서의 가스 사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08년 동경 에서 설립한 일한와사(주/日韓瓦斯)는 조명과 난방, 취사 를 동시에 겸할 수 있는 가스 사업을 펼쳤으나 조명은 한미 전기회사가 전등사업을 독점하고 있어서 타격을 받았다. 난방이나 취사 역시 온돌문화가 발달한 한국인에겐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가정 이나 공장 등의 특수열(熱)로 이용되는 게 전부였다.

일한와사(주)로서는 당시 서울 시내의 전차, 전등 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한미전기회사가 부러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성전기회사를 손아귀에 쥐고 사명까지 한미전기회사 로 바꾼 콜부란(H. Collbran)은 회사를 매각할 기회만 엿보다가 전기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한와사(주)에 접근, 마침내 1909년 6월 23일 한미전기회사를 매도하는 매매계약 조인을 성공시켰다.

매매계약 조건은, 일한와사가 120만 엔을 콜부란에게 지불 하고 사채 50만 엔을 인수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결국 한미 전기의 당초 주인이자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 고종은 제외 된 채 한미전기의 모든 재산과 특허권은 일한와사(주)로 양도되고 말았다. 콜부란은 매도대금 120만 엔을 통째로 틀어쥐고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소위 ‘먹튀’를 한 것이다.

고종에 의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기업인 한성전기회사는 설립한 지 5년 만에 한미전기회사로 사명이 바뀌 고, 다시 5년 뒤인 1909년 일본인 기업으로 양도된 것이다.

 

2※건설이 한창인 경성전기 사옥. 내진설계가 반영된 첨단 건축물로 축조

서울, 경기 및 강원도 일원 전력공급 관할

한미전기회사를 매수한 일한와사(주)는 1915년 9월 11일 사명을 경성전기(京城電氣)로 바꿨다. 사업영역을 넓히기 위해 마산지점, 진해지점을 설치하는 한편 배전사업체인 인천전기(주), 수원전기(주), 춘천전기(주)를 차례로 흡수 합병해 경상남도 일부와 경기, 강원도 일원의 전력공급 구역을 편입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마산, 진해지점은 조선 와전(주)에 양도(1935)함으로써 경남에서는 손을 떼고, 서울과 경기, 강원도 일원만 전담하게 됐다. 서울 시내의 전차사업도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신용산선을 비롯해 청량리선 연장, 서대문~동대문 간 복선화, 신용산선 복선화, 을지로선, 왕십리선, 광화문선, 안국동선, 통의동선, 장충단선, 태평로선, 신용산~한강인도교 간 연장, 서대문~영천 간 연장 등이 그것이다. 경성전기는 전차사업을 보조하기 위해 1927년 버스영업허가를 출원했으나 조선총독부는 공익사업을 경성전기에만 독점시킬 수 없다는 방침 아래 1928년 경성부로 하여금 버스사업을 경영케 하였고, 서울~인천 간에는 별도로 경인버스(주)를 설립해 경인 간 운수사업을 담당케 했다.

이리하여 경성전기 전차와 경성부 공영버스, 그리고 경인버스 간에는 주요 노선에서의 병행운행으로 말미암은 3사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그 후 조선총독부는 3사 간의 경쟁으로 인한 운수 수입의 분산이 기업의채산성을 악화시킨다고 보고 1933년 3월, 경성부 공영버스를, 그리고 1934년 1월에는 경인버스마저 경성전기에 통합시킴으로써 서울에서의 시내 외 운수사업을 경전에 독점시켜 버렸다.

이 같은 통합은 전기사업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정책이 발표된 이후의 조치이긴 하나 교통수단의 통합 축소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자재와 물자의 부족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수송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수송력 부족으로 인한 교통 혼란이 가중되자 이번에는 ‘급행운전’이란 이름으로 시내 30여 개소 정류장의 무정차운행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3※경성전기는 본래 일본계 자본가들이 일한와사(주)를 설립, 서울에서 가스사업을 운영하다가 콜부란으로부터 한미전기회사를 매수해 사명을 경성전기 (주)로 변경했다. 사진은 일한와사 창설자들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사업을 급신장시켰다.

일제의 정책적 지원 속에서급신장한 경성전기(주)

한편 발전설비에 있어서는 한미전기 매수 후 마포발전소(뒤에 용산발전소)의 500kW 증설(1910)을 위시해 1925년까지 전후 4차에 걸쳐 12,000kW를 증설했다. 그리고 금강산전철(주)로부터 2,500kW의 전력을 수전하기 시작(1924)해 점차 수전규모를 8,000kW선까지 증가(1940년)시켰다. 그러나 증가일로에 있는 전력수요를 감당키 어렵게 되자 그동안 추진해오던 당인리발전소 1호기(10,000kW)의 설치공사 준공(1930)으로 이에 대처하였고, 다시 2호기(12,500kW)의 설치를 완료(1935)함으로써 공급력에 여유가 생기게 되자 기존의 용산발전소는 완전히 예비발전소로 돌려졌다.

1만kW급 터빈발전기를 설치한 당인리발전소는 당시로써는 한국 내 최대용량의 발전소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공급의 여유도 얼마 가지 못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을 병참기지화 하려는 일제의 정책전환은 경인지구에서의 동력수요를 격증시켰기 때문이다. 때마침 완공된 평양~서울 간 154kV 송전선에 의해 경전은 1937년 가을부터 조선송전(주)을 통하여 장진강수력의 전력 7만 5,000kW를 수전할 수 있게 되어 당인리발전소를 예비발전소로 돌리고 용산발전소는 폐지했다.

이 같은 수요의 신장으로 1940년대에는 경인·수원지방을 합친 수요전력이 동절기 최고 45,000kW, 하절기 최고 35,000kW에 달하였다. 이는 10년 전인 1930년의 동절기 최고 15,000kW, 하절기 최고 12,000kW와 대비하면 3배로 증가한 것이다. 이렇듯 일제가 정책적으로 지원한 경성전기(주)는 그 밖의 어느 회사보다도 신장세가 돋보였다. 조선총독부가 전국 배전회사의 통합방침을 내걸었던 직후인 1933년에는 전국 전등수용가 27만 8,504호의 3분의 1인 9만 4,952호가 경성전기 관내에 집중돼 있었다. 경성전기(주)는 1961년 7월 1일 조선전업과 남선전기 등 3사가 통합, 한국전력(주)으로 탄생했다.

– 사보 ‘수차와 원자로’ 2014년 7월호 발췌(http://ebook.khnp.co.kr/Viewer/BBDT5ZZQEXQB)

송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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